11월 《황광우의 산책》
나병식 출판기념회에 다녀오다
한양 천리 길이다. 좀체 서울행을 하지 않는 내가 일고의 주저 없이 아침 8시 서울행 고속버스를 탄 것은 10년 전에 작고한 한 선배의 평전출판기념식 때문이었다.
민청학련 사건으로 사형 선고를 받은 이철의 이름은 알아도 이 분의 이름은 잘 알지 못한다. 스물두 살 청년이 군사재판의 사형 선고 앞에서, “영광입니다. 고통받는 민중을 위해 아무 하는 일이 없는 저에게 이렇게 사형 선고를 내려주시다니 영광입니다.”라고 말한 이는 김병곤이다. 그때 여덟 명의 청년이 사형 선고의 명단에 올랐다. 시인 김지하, 국회사무총장 유인태의 이름은 들어 보았어도 이 분의 이름을 기억하는 흔하지 않을 것이다.
나병식. 그는 광주 송정리에서 태어났고, 광주일고를 나와 서울대 국사학과에 입학하였다. 1972년 박정희가 유신헌법을 선포했을 때, 청년 학생들은 자취방에서 숨죽여 흐느꼈다. 1972년 12월 광주에선 김남주, 이강 두 청년이 유신체제의 종말을 외쳤다. 그리고 1973년 10월 서울대 문리대학생들이 반독재투쟁의 횃불을 높이 들었다. 전국의 여러 대학에서 이에 동조하는 시위가 물결처럼 일어났다. 일파가 만파가 되어 일어났다. 본인의 호(號)를 만파라 자칭하던 나병식은 만파의 물결을 타고 <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약칭; 민청학련)이라는 역사의 새 물결을 일으켰다. 한 사람이 역사의 백척간두에 서서 역사의 새 지평을 여는 일이란 아무나 하는 일이 아니다.
북극의 한파가 서울을 덮쳤고, 눈이 한 점 두 점 창밖에서 휘날렸다. 오늘 밤도 주린 배를 움켜쥐고 추운 방에서 몸을 떨고 있는 이들이 있을 터인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