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오르는 강’-흥학관 이야기 조선애를 만나고 진주를 떠난 양만석이 광주 역에 도착한 것은 다음날 새벽, 동이 틀 무렵이었다. “양만석이 찾아간 곳은 흥학관(興學館)이었다. 본정에서 나와 부동교 방향으로 큰 길을 따라 오다가 모퉁이를 꺾어 돌자, 마치 학교 건물처럼 벽에 유리창들이 여러 개 달린 집이 나왔다. 양만석은 한참이나 흥학관 앞에 서서 건물을 쳐다보았다. 중앙의 ‘흥학관(興學館)’이라는 간판이 눈에 들어왔다. 입구 양쪽에는 광주청년회, 노동공제회 광주지회, 광주청년학원 등의 간판들이 다닥다닥 붙어있었다.”(8권,58쪽) 지금 양만석이 서 있는 흥학관은 지금으로부터 100여 년 전 민족계몽운동의 요람이었고 광주 독립 운동의 산실이었다. 당시 신문을 읽자. “조선노동공제회 광주지부에서는 1921년 10월 1일부터 노동야학을 개시하였는데 장소는 흥학관이오.”(동아일보, 1921,10,2) 1970년대 이곳 광주엔 녹두서점과 현대문화연구소가 있어 ‘타는 목마름으로’ 민주주의를 외치던 청년들이 이곳에서 만나 서로 정보를 주고받았듯이, 1920년대의 흥학관 역시 정의에 굶주린 청년들의 모임 마당이었다. 최명구(1860-1924)라는 부자가 있었다. 나이 60이 되면 부호들이 환갑잔치를 거판나게 치르던 그 시절, 1921년 최명구는 자신의 환갑잔치를 간소하게 치르고선, 절약한 경비를 광주 공동체에 내놓았다. 200여 평의 건물을 짓고, 시민들 300여 명을 초대하여 낙성식을 거행했다. 흥학관에는 교실과 강당이 있어, 이곳에서 강연회를 열었고, 연극공연도 열었다. 그야말로 ‘빛고을의 마당집’이었다. 나는 올 봄 소설 ‘타오르는 강’을 읽으면서 흥학관을 처음 알게 되었는데, 올 가을 흥학관 주인의 자손을 만나게 되었다. 참으로 기이한 인연이었다. 지난 9월 나는 (사)광주학생독립운동기념사업회가 주최하는 강연에 가서 ‘1930년대 독립운동’에 대해 이야기를 하였다. 그 자리에 흥학관의 자손 최기성 씨가 앉아 있는 것이 아닌가? 타임캡슐을 타고, 100년 전의 광주로 빨려 들어가는 느낌, 뭐라 표현하기 힘든 아리아리한 흥분을 느꼈다. ‘타오르는 강’ 8권에 흥학관의 이야기가 나온다는 것을 나는 최기성 씨에게 알려주었다. 역시 소설 속의 흥학관은 최기성 씨에게도 뉴스였다. 최기성 씨로부터 다시 전화가 왔다. 보고 싶다는 것이다. 지금 최기성 씨는 할아버지의 삶을 이해하기 위해, 할아버지의 삶에 내재된 의문을 풀기 위해 열심히 공부하고 있는 중이었다. 다시 만난 최기성 씨는 나에게 ‘최승효 가옥’의 비사를 들려주었다. 그 유명한 양림동의 한옥 말이다. 최명구가 흥학관을 지었고, 최명구의 아들 최상현이 ‘양림동 한옥’을 지었다. 가옥의 부지가 3000평이 넘었다. 백두산에서 가져온 소나무로 지었단다. 그러니까 양림동의 한옥 ‘최승효 가옥’은 ‘최상현’의 손에서 탄생한 것이었다. 최상현의 자손들은 이 집에서 1970년대까지 살았는데, 빚보증을 잘못 서는 바람에 이 집이 그만 최승효 씨에게 넘어갔다는 것이다. 지금 빛고을의 감춰진 비사, 역사의 속살이 나에게 드러나는 순간이었다. 그리고 최기성 씨는 나에게 소책자 한 권을 주고 떠났다. ‘양림동 사이다’라는 제목의 이 소책자엔 재미있는 이야기가 많았다. 역사의 지층 저 깊이에 묻혀 있던 또 한 명의 독립운동가가 살아 나에게 걸어오고 있었다. 최상현은 독립운동가들에게 자금을 대주던 부호였다. 1924년 아버지 최명구가 세상을 떠나고 이후 흥학관의 살림을 맡은 이는 최상현이었다. 1942년 죽기 전까지 흥학관을 운영했다. 광주 학생운동의 주역 왕재일도 이 흥학관에서 숙식을 해결하며 공부하였다. 장재성을 비롯한 성진회 회원들, 광주학생독립운동의 주역들이 출입한 공간이 이 흥학관이었다. 당연히 일본당국은 흥학관의 일을 사사건건 간섭하였다. 최상현은 호를 ‘일롱(一聾)’이라 지었다. 일제의 말은 일절 듣지 않겠다는 뜻이었다. 최상현은 여러 번 경찰서로 불려가 뺨을 얻어맞는 모욕을 당했다. 주위 사람들의 전언에 의하면, 최상현은 독립운동기금과 인재 육성기금 등으로 거액을 기부하면서 ‘이름을 밝히지 말 것’을 신신당부했다고 한다. 최상현의 장손 최윤성의 회고는 자못 충격적이다. 현 전남대 의과대학의 전신인 광주의학전문학교의 건립을 위해 최상현은 지금 돈으로 300억 원이 넘는 거액(당시 80만원)을 기부하였다는 것이다. 빛고을의 감춰진 이야기, 속살을 나는 이렇게 만났다. 최상현 선생은 슬하에 3남 5녀를 두었다. 자녀들 역시 어질고 온순하였다. 큰 며느리 조규희 씨는 요리를 잘했는데, 학교에 다니는 조카, 시동생들의 도시락을 도맡아 싸주었다. 둘째 며느리 임묘남 씨는 부엌 선반에 보리밥을 많이 해두어 가난한 이들이 언제든 와서 밥을 먹도록 해주었다. 가난한 이들을 돌보아야 한다는 것이 최상현의 가르침이었다. 1952년 양림동 가옥에서 태어나 1970년대 후반까지 이곳에서 소년시절을 살았던 최기성(최상현의 손자)은 학창 시절 저녁 늦게까지 친구들과 놀다가 배가 고프면 함께 집에 와 밥을 먹었다고 한다. 배고픈 이들이 들어와 밥을 먹고 갈 수 있도록 배려하는 것이 최상현의 유지였다. 요즘의 젊은이들은 모르겠지만, 늘 배가 고팠던 그 시절 밥은 인권이었다. 양림동 가옥은 밤늦도록 대문을 잠그지 않았다고 한다. “양만석은 곧장 흥학관으로 향했다. 그날 저녁 때 십팔회 모임이 있는 날이어서 청년회 사무실에는 지용수와 장석천이 나와 있었다.”(8권, 298) “‘흥학관 앞에 사복형사들 안 보이더냐?’ 지용수가 놀라는 표정으로 물었다. ‘모르겠던데요.’ 장재성은 밖에 나가보겠다고 했다.”(8권, 314) 픽션 ‘타오른 강’에 나오는 등장인물의 다수는 팩트이다. 지용수와 장석천은 1920년대 광주청년운동을 이끈 분들이었다. 장재성 역시 1929년 광주학생독립운동을 이끈 분이었다. 그렇다면 흥학관의 운영자 최상현도 대단한 독립운동가였음을 우리는 인정해야 한다. 그런데 현실은 그렇지 않다. 독립운동가들이 흘린 땀으로 대한민국이라는 나라가 세워졌는데, 대한민국은 독립운동가들에게 서훈하는데 지독히 인색하다. 누구의 나라인가? 언제까지 이럴는지 부끄럽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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