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토바람에 풀빛 좋은 책 한 권을 공유하는 것이 내가 ‘전라도’에 독후기를 올리는 이유이다. 곽병찬의 <향원익청>이나, 비숍 여사의 <조선과 그 이웃나라들>, 최명희의 <혼불>과 문순태의 <타오르는 강>은 ‘전라도 닷 컴’에 제법 어울리는 책들이었다고 나름 자부한다. 기해년 한 해가 가고 있다. 오늘이 12월 20일인데, 유독 그 이름을 부르고 싶은 분이 있다. 나병식 선배이다. 이 분의 삶을 추모하는 지인들의 수기가 <황토바람에 풀빛>이다. 나는 이 추모문집이 ‘전라도 닷 컴’에 추천할만한 책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이번 달엔 무슨 책을 소개하지? 몇 번 망설였다. 하지만 기어코 <황토바람에 풀빛>을 상재하기로 마음을 묵었다. 나병식은 1966년 광주일고에 입학했고, 1970년 서울대에 입학했다. 나병식은 1970년대에 세 번이나 감옥을 다녀온 걸출한 민주투사였다. 나도 1974년 광주일고에 입학했고, 1977년 서울대에 입학했으며, 박정희가 죽기까지 두 번이나 감옥을 다녀왔으니 나는 나병식을 비껴갈 수가 없었다. 내가 처음 선배를 만난 것은 1983년이었다. 그때 형은 역촌동 어디에선가 출판사를 경영하고 있었다. 그때 나는 서울 신림동 낙골에서 야학을 운영하고 있었고, 강학들과 함께 공장에 들어갈 준비를 하고 있었다. 영등포 청소년 직업훈련소에 입학하여 선반 기술도 배우고 용접 기술도 익히던 무렵이었다. 자취방 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우리는 번역 일감을 구하러 다녔다. 번역꺼리를 마련하기 위해 나병식 선배를 만났다. 풀빛에서 나온 <경제학 사전>과 <유럽노동운동의 비극>과 <노동가치론의 역사>가 다 이때 병식 형으로부터 얻어온 번역 일감이었다. 이후 나는 자주 풀빛출판사를 방문하였는데, 선배는 그때마다 나에게 술을 사주었다. 밤 12시가 넘어도 선배는 우리를 보내주질 않았다. 형은 만나면 시국을 논하였다. 무슨 할 말이 그렇게 않았는지 모르겠다. 안경 너머로 이글거리는 눈빛, 다 토해내지 못한 분노가 인상적이었다. 새벽 다섯 시가 되면 해장국 집을 찾아 어슴푸레한 여명의 길거리를 헤매는 것이 우리의 관례였다. 그리고 또 집에 같이 가잔다. --이 사람은 누구인가?-- 곽병찬은 회고한다. “빈농의 아들로 태어나 가족의 희생과 헌신 속에서 서울대생이 되었지만, 그는 가족의 아들이 아니라 세상의 아들이 되었다.” 오상훈은 회고한다. “땔감이 귀한지라 어린나이에도 송정리역을 오가는 석탄 실은 차량에 올라가 석탄을 퍼 나르고 도망치기도 했다.” 이무성은 회고한다. “어려운 집안형편으로 광주상고로 진학 후 1년 후 다시 광주일고로 진학하여 후배들과 동기생의 인연을 맺기도 하였다.” 장영달은 회고한다. “전과자, 서울대 제적생, 나병식은 변방의 허름한 가게에서 아버님, 여동생이랑 튀김집을 경영하였다.” --이 사람을 보라.-- 김경남은 회고한다. “나병식은 세상의 만파를 뛰어 넘으려 몸부림치는 구도자처럼 보였다. 그래서 나는 그를 만파라고 불렀다.” 이철은 회고한다. “아무리 급해도 급할 것이 없고, 아무리 어려워도 어려울 것이 없으며, 아무리 난감해도 주저함이 없었다.” 김종철은 회고한다. “1987년 6월 항쟁 기간에 나는 서대문구치소에서 나병식과 이웃이 되었다. 풀빛에서 펴낸 <한국민중사>가 국가보안법에 걸린다고 해서 구속되었다는 것이다. 박정희 정권 때 사형선고까지 받았던 그는 책 때문에 잡혀 들어온 사건은 구류쯤으로 여기는 것 같았다.” --그는 어떤 사람이었나?-- 박관석은 회고한다. “형의 모습은 수호지에 나오는 양산박 두령이었다. 형은 사람들을 불러 모았다. 온갖 직종의 사람들이 형의 전화 한 통에 여관방으로 모여들었다.” 박부권은 회고한다. “장대한 체구가 쏟아 놓는 말은 쉼 없이 떨어지는 폭포수였습니다.” 신형식은 회고한다. “아침저녁으로는 사무실 옆 식당에서 배달해 주던 백반을 병식 형과 함께 먹었고 점심에는 주로 짜장면을 시켜 먹었다. 병식 형은 참으로 짜장면을 좋아했다.” 박석률은 회고한다. “우리집에 같이 갑시다. 어렵사리 생활을 하던 그 시절, 벗들과 하루 밤 같이 자지 않으면 친한 사이가 아니라는 게 만파 나병식의 생활 철학이었다.” 김 찬은 회고한다. “그는 다정하고 소박한 사람이었다. 집에 전화를 걸어 ‘나힘찬’과 ‘나빛나’를 찾아 목소리를 들으며 즐거워하는 소박한 가장이었고, 찾아오는 후배들과 다정한 술자리를 하며 어려움을 들어주고 고민해주는 자상한 선배였다.” --그는 이런 사람이었다.-- 이이화는 회고한다. “그는 뒷전에서 남을 돕고 끌어주는 역할을 했다.” 이종범은 회고한다. “자신이 가질 것을 셈하지 않았다. 세상에 베풀 것이 적어지지 않을까 아파하였다.” 정근식은 회고한다. “듬직함이 사라지고 찌질함이 넘쳐나는 시대, 그의 빈자리가 더욱 커진다.” 남영신은 회고한다. “그는 희생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 그는 순진하고 진실한 사람이었다. 그는 영악함과 거리가 멀었다.” 김 찬은 회고한다. “나병식 선배는 문사철을 두루 갖춘 진정한 인문학도였다. 사람에 대한 진한 애정이 있었다. 인생사 영욕의 부질없음을 알고 있었다. 욕망을 쫒는 속물이 아니었다. 의인이었다.” 나병식은 2010년 대장암과 투병하다가 2013년 12월 20일 선종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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