홈페이지에서 보기: https://dongosong.net/archives/7227 동고송 회원 여러분. 감사합니다. 여러분의 후원 덕택에 28인의 독립유공자의 맺힌 한(恨)을 풀게 되었습니다. 저는 20년 전 독립투사 황동윤의 아들을 만나 아버지의 한 맺힌 사연을 들었습니다. 완도 지역의 독립운동을 이끌었던 황동윤 어른은 해방이 되고 완도 인민위원장을 맡았는데 정부 수립 후 1948년 9월 어느 날 우익 깡패들이 쇠몽둥이로 아버지의 뒤통수를 쳐서 죽였답니다. 아! 이게 <해방전후사>로구나. 아들의 증언은 내 어머니가 들려주었던 완도 독립투사의 이야기와 꼭 같았습니다. 어머니는 나의 삶에 대해 늘 자랑스럽게 말하였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말하시는 것이었습니다. “광우야, 다 좋은데, 좌익의 끝이 너무 불행하더라.” 오늘 그 좌익의 리더였던 황동윤 선생의 서훈을 이끌어냈습니다. 무등일보: https://mnews.sarangbang.com/detail/article/2713908 "이번 서훈은 광주학생독립운동의 역사적 계승과 자리매김을 위한 작은 시작에 불과합니다. 당시 운동에 참여한 사람들을 비롯, 음지에서 조국 독립을 위해 몸을 바친 운동가들의 서훈이 하루 빨리 이뤄져야 합니다." 1일 광주학생독립운동 등 28명의 정부 서훈을 이끌어낸 황광우 (사)장재성기념사업회 운영위원장은 이번 서훈의 의미와 과제를 이같이 밝혔다. 그는 "지난해 5월 광주지방보훈청장에게 73명에 대한 서훈 요청서를 전달한 후 10개월 만에 28명이 정부 서훈을 받게 됐다"며 "서훈에서 탈락한 이들과 유족들이 정당한 평가를 받지 못해 아쉽고 안타깝다"고 말했다. 그는 수년 동안 발품을 팔아 관련 사료 발굴과 조사를 거쳐 아들을 발굴했다. "1930년대 이전 독립운동은 민족주의 계열이, 30년대 이후에는 사회주의 계열의 운동가들이 주도했는데 사회주의 활동을 했다는 이유로 서훈에서 누락된 경우가 많다. 이들은 당시 시대 상황에 맞게 각자 위치에서 운동을 펼치고 짧게는 1년에서 길게는 4년 가량의 옥고를 치르며 조국 독립을 위해 헌신한 이들입니다." 황 위원장은 "이번 서훈 대상자에 포함된 이들중 함경도 등 북한 지역 출신은 유족이 남한에 없어 서훈이 확정되고도 상을 전달할 길이 막막하다"며 "정부 차원에서 남북채널을 가동해 해당 유족에게 서훈 확정 사실을 알려야 할 것"이라고 지적했다. 그는 광주서중·일고 100주년 기념사업회가 최근 발간한 '무등의 빛'(심미안刊)에서 광주학생독립운동부터 현재까지 독립과 민주를 위해 젊음을 바친 33명 동문들의 삶과 행적을 밝혀내기도 했다. 그는 "광주학생독립운동의 정신적 지주인 송홍 선생만 해도 그에 대한 역사적 평가는 아직까지 제대로 이뤄지지 못하고 있다"며 "1929년 11월 3일 광주학생독립운동의 조직적 구성을 맡은 성진회와 독서회에 참여한 왕재일과 장재성, 최규창, 정우채, 김상환, 김보섭 등이 송홍 선생의 제자들이었다"고 강조했다. 이어 "이번 서훈에서 누락된 운동가들의 추가 서훈을 위해 지역 국회의원 등을 만나고 국가보훈처에도 다양한 채널을 통해 이들을 위한 활동을 펼쳐나갈 계획이다"며 "기록이 분명하고 근거가 명확한데도 서훈을 받지 못하는 작금의 현실에 개탄을 금하지 않을 수 없다"고 역설했다. 그는 "광주학생독립운동만 하더라도 이들의 희생정과 정신이 군부독재시기인 1970-80년대에까지 이어져 이 땅의 민주화를 가능하게 한 원동력이 됐다"며 "조국 독립을 위해 목숨을 바친 이들을 발굴해 추가 서훈을 통해 역사적 계승이 이뤄질 수 있도록 모든 노력을 다할 것"이라고 밝혔다. 홈페이지에서 보기: https://dongosong.net/archives/722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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