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례의 시인들 왕석보와 왕사각 그리고 황현 호남은 예로부터 절의의 고장이라 일컬어왔고, 또 그 사대부 중에 가끔 시에 뛰어난 사람이 있어서 시인의 고장이라고 일컬었다. 호남의 동쪽에 봉성현이 있으니 탄알처럼 작은 고을이다. 천사 왕 선생이 나온 이후로 호남에서 구례를 詩鄕으로 추켜올렸다. 지금 선생이 돌아가신지 이십여 년에 선생을 추종하는 詩派의 흐름이 점점 넓어져 차차 작가의 대열에 오르게 되었다. 선생과 같은 분이라면 한 지방의 風氣에 관계되는 분이라고 할만하다.1) “自王川社先生出而全省以詩鄕推鳳城 今踞先生歿已二紀而派流摲廣稍稍升作者之列 若先生者可謂關一方之風氣者也.”2) 1. 황현의 스승, 왕석보와 왕사각 지금 황현이 회고하는 스승은 19세기말 구례의 시풍을 일으킨 왕석보(王錫輔, 1816~1868)이다. 황현(1855~1910)은 어린 시절 왕석보에게 나아가 수학하였다. 1866년 12세 때 구례를 찾아와 제자의 예를 올렸고 이후 3년 훈도를 받았다. 1868년 왕석보가 타계한 후 황현은 왕석보의 아들 왕사각(1836~1895)을 스승으로 모셨다. 藐余童年아득한 유년 시절 就傅公里공의 마을 찾아가 글을 배웠네 我嬸公姑내 큰 엄마가 공의 고모였기 때문에 實宅于是나는 공의 집에서 머물렀네3) 황현의 큰엄마가 왕석보의 여동생이었다. 황현은 광양에서 구례로 옮겨와 왕석보와 왕사각 두 분을 스승으로 모셨는데, 그 뒤에는 큰 엄마가 있었다. 황현은 구례의 학창시절 큰어머니의 집에서 숙식하며 공부했다. 그래서 “소자는 어머니가 안 계신 것은 아니었지만 백모가 저의 어머니이셨습니다. 그때 소자의 나이가 여덟 살이라 백모는 어미와 떨어진 저를 생각하여 맛있는 음식이 있으면 반드시 먼저 먹이셨습니다.”라고 큰어머니를 추모했다. 아버지와 아들 두 분을 스승으로 모신 사례는 흔치 않다. 황현이 배우고 따르고 싶어 한 왕석보와 왕사각 두 분의 학문과 인품이 어느 정도인지 자못 궁금하다. 선생의 문하에서 우국지사가 많이 배출된 것은 왕씨 일가의 절의와 지조, 청절(淸節)의 가르침 때문이었을 것이다. 2. 천사 황석보의 인품 천사 왕석보는 1816년 구례 광의면 천변리에서 출생하였다. 천사는 성품이 맑아서 명리를 탐하지 않았다. 젊은 시절 庭試에 나아갔으나, 과거에 응시한 선비들이 청탁을 일삼는 행위를 본 후 과거에 대한 뜻을 버렸다. 이후 귀향하여 평생을 은거한 학자이자 시인이었다. 천사 왕석보는 과거 보는 일을 폐하고 山水간에 살기로 마음먹고 경치 좋은 곳이 있다고 하면 지팡이 하나에 짚신을 신고 수백리 길도 멀다고 여기지 않고 찾아다녔다. 丙午(1846)년 8월에는 구례 燕谷의 山水를 좋아하여 이사를 와 살게 되니, 원근의 사람들도 같이 와서 이웃하며 산집이 6, 7가구는 되었다. 또한 풍문을 듣고 배우기를 원하는 자들 역시 모여들었다. 선생은 평소 성품이 관후해서 빠른 말과 급한 색이 없었다. 사람과 접할 때 화기가 애연해서 아래로는 종에 이르기까지 은혜로 무마하고 가혹하게 책망을 하지 않았다. 그래서 천사공을 보면 누구든지 흔연한 마음을 품었다. 평소 절약하였고 검소해서 화려하고 아름다운 옷을 입지 않았다. 소리와 색과 구경거리를 좋아하지 않았고 財利와 공명의 말을 입에 내지 않았다. 종일 침묵하고 단정히 앉아 있었으니 사람들이 그의 생각의 넓이를 헤아리지 못했다. 일찍이 조선조 성리학 6대가 중의 일인인 기정진 선생을 오산(鰲山)에서 뵈었다. 기선생은 흔연히 영접하고 시를 주었다. 천사공은 이 시를 잘 갈 간직하였다. 선생은 젊었을 때부터 시를 잘 지었고, 만년에는 더욱 공을 들여 시를 지었다. 천사의 시 한 편을 읽는다. 比隣參語集茅廬 이웃들이 얘기하느라 초가집에 모였는데 片石松明一握餘 조각돌 위 관솔불 한 줌 되네. 蟋蟀鼓中燃客夢 귀뚜라미 울음 속에서 나그네 꿈을 사르고 淘花深處照農書 꽃을 헹구는 깊은 곳에서 농서를 비추네. 煤走幽巷苔紋細 연기 피어나는 골목에 이끼 무늬는 옅고 光透空庭竹影疎 빛이 통한 빈 뜰에 대나무 그림자는 성기네. 慣是山翁試閒事 늘 하듯 산옹은 한가한 일을 하는데 溪頭時把觀游魚 가끔씩 시냇가 고기를 살펴보네.4) 돌아가던 날 저녁에 말하길 내 命宮의 별이 근일에 보이지 않으니 내가 아마 죽을 것이라 하였다. 의관을 바르게 하고 가사에 관해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돌아갔다. 3. 봉주 왕사각의 품격 尋眞暇日向沙門 진경을 찾아 한가한 날에 절문을 향해가니 寺下春江十里村 절 아래 봄 강물 십리 거리의 마을이라. 洞霧鎖來迷失路 동구가 안개에 잠겨 있어 혼미하여 길을 잃었고 澗花浮去漸窮源 시냇가에 꽃이 떠가니 점점 근원을 찾아갔네. 木魚撞送雲間響 목어는 쳐서 구름 사이에 소리를 보내고 松鶴棲留塔上痕 소나무의 학은 머물러 탑 위에 흔적을 남겼네. 寄語方壺列仙子 방호산의 여러 신선에게 부탁 말 보내노니 好分餘瀝紫霞樽 남은 이슬로 빚은 자하준 술을 잘 나누소서.5) 이 시의 작자 왕사각(1836~1895)은 왕석보(1816~1868)의 장남이다. 어려서부터 학문에 뛰어난 실력을 보였으나, 부친과 마찬가지로 평생 벼슬에 나아가지 않고 은거한 인물이다. 매천 황현이 왕석보에게 훈도를 받은 것은 불과 3년이었지만 왕사각과는 30년에 걸쳐 사제관계를 맺었다. 왕사각은 성품이 너그럽고 대범했다. 과거장에서 답을 쓰지 못한 자가 있으면 그를 위해서 대신 지어주었고, 어려운 글제를 만나 묻는 자가 있으면 그에게 상세하게 풀어주었다. 중년에 과거를 보려고 서울에 올라갔으나 과장의 일이 그릇됨을 보고 마침내 과거에 뜻을 끊었다. 돌아와 백운산 만수동으로 이사하여 살았다. 자비를 들여 생도들을 가르쳤다. 수업할 때면 피곤함을 잊고 가르쳤다. 평소 사람 착한 것을 말하기를 즐거워했고, 남의 악한 것을 말하지 않았다. 봉주공은 소시에 유산이 자못 넉넉했으나 자신의 밭을 팔아 동생들을 도왔으니 마침내 살림살이가 바닥에 이르렀다. 조금도 후회하는 뜻이 없었다. 魁士如公공처럼 우뚝한 선비 世罕其匹세상에 필적할 이 거의 없었네 撫我尫弱내 몸이 약하다고 어루만져 주시며 不施夏楚하와 초의 회초리는 들지 않았네 幼年甚侗어린 나이 너무나 어리석어 認非嚴師엄한 스승 아니라고 생각하였네 時復攬帶수시로 허리띠를 잡아 쥐고서 昵昵兒嘻허물없이 웃으며 장난도 쳤네 公笑勿嗔공은 화도 내지 않고 웃으시며 是好弟子이 녀석 참 좋은 제자야 敏汝記誦너의 암송 실력이 민첩하여 吾定赦爾내가 너를 꼭 용서해 주지6) 황현은 스승을 이렇게 회고하였다. 4. 황현과 왕씨 일가의 인연 황현은 3년 남짓 왕석보의 가르침을 받았다. 그가 훗날 조선의 대표적 시인의 반열에 오를 수 있었던 중요한 배경의 하나로 왕석보의 훈도를 꼽을 수 있다. 왕석보가 타계하고 황현은 왕석보의 아들 왕사각을 스승으로 모시고 공부하였다. 1877년 황현의 나이 23세에 쓴 시를 읽어본다. <춘사에 독서하다 봉주 등 제공과 함께 서시 천변으로 가 술을 마시다> 芳年蘭蕙大年松꽃다운 나이 난蘭과 혜蕙가 있고 늙은 솔 있는데 不到名山不願逢명산을 오르지 못해 만남을 원하지 않았네 春草衣冠讀世事봄풀에 의관을 정제하고 세상사를 읽으며 澄江沙石露天容맑은 강가 모래에 하늘 모습이 드러나네 彼人强酒聊遠性억지로 술을 먹여 본성이 멀어졌고 自我探花誤認農내 스스로 꽃을 찾아 농부로 오인하네 眼底川原何處盡눈 아래 냇가 벌판 끝이 어디인가 纈黃西日下城墉황혼의 해 성벽 너머 지네7) 황현이 스무네 살에 구례 만수동으로 이거한 배경에는 왕사각이 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10년 후 왕사각이 죽자 “나는 어릴 때부터 함장(函丈)이라 불렀으니 사우간의 세의가 우리만한 이 없었다.”며 왕사각을 애도했다. 매천가와 왕씨가의 인연은 후대까지 이어졌다. 매천은 왕사각의 두 동생 왕사찬, 왕사천과 교우관계를 맺었다. 왕사천은 황현이 ‘형으로 모시는 벗’이었다. 1877년 함께 한 남해 여행이 가장 뜻 깊었다고 회고했다. 1902년 황현이 구례의 월곡으로 이사하게 된 것도 가까운 이웃 마을에 왕사천이 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만큼 황현은 왕사천을 따르고 존경했다. 황현은 왕석보의 가족들과 스승과 제자, 사형의 관계를 맺었다. 왕사각에게는 왕수환과 왕경환 두 아들이 있었는데, 왕수환과 왕경환은 황현으로 스승으로 모셨다. 광주학생독립운동의 왕재일은 왕경환의 아들이다. 왕사각의 아들 왕수환은 조부인 왕석보, 부친인 왕사각을 비롯하여 두 숙부 왕사천, 왕사찬의 詩選을 편찬하였다. 이른바 『開城家稿』이다. 4부자의 공동시집인 『開城家稿』의 편집을 맡은 이는 창강 김택영이었다. 김택영은 네 군자가 세상에서 버림받아 마음이 울적하였던 분들이었다고 밝히고 있다. 하루는 운초가 家稿를 보내주며 나에게 서문을 부탁하는데 유고 제목은 ‘川社’였다. 선생의 휘는 錫輔이며 그의 세 아들은 鳳洲, 素琴 그리고 小川 師瓚이다. …… 지금에 所謂 지리산이나 순강을 누가 높다고 말하고 누가 맑다고 말하는가? 아니 素琴子가 飄然히 父兄을 奉陪한 것을 말한 것인가? 선생은 冥茫한 속, 塵埃 바깥에서 세상사 버리기를 마치 헌짚신 버리듯 하고, 다시는 興亡得失 悲歡苦樂에 대해 말한 것이 없으니, 다행인지 불행인지. “一日雲樵送其家稿 徵序在稿之首者 曰川社 先生諱錫輔 其三子鳳洲素琴及小川師瓚…… 今則所謂智異之山鶉江之水孰爲之高而孰爲之淸也 抑素琴子之飄然奉陪父兄 先生于冥茫之中塵埃之表遺棄世事如脫屣無復 所謂興亡得失悲懽苦樂者幸耶非耶.”8) 왕수환은 김택영에게 왕씨 가문의 유고들을 보내 선별하여 줄 것을 요청하였다. 왕석보의 시 1,400수, 왕사각의 시 1,200수, 왕사찬의 시 2,000수 도합 4,600편에 달하는 방대한 유고였다. 그런데 김택영이『開城家稿』에 수록한 시는 왕석보의 시 23수, 왕사각의 시 35수, 왕사찬의 시 200수였다. 4,600편의 시가 어쩌다 이렇게 줄었을까? 왕수환은 지나치게 소략하게 편집된 것에 대해 서운함을 표시하였다고 한다. 1) 홍영기, 『황현』, 역사공간, 2018. 52-53.` 2) 최승효 편, 「천사시고서」, 『국역 황매천 및 관련인사 문묵췌편』 상, 59-60쪽 3) 김영붕, 『매천 황현 시와 사상』, 보고사. 126. 4) 王錫輔,『王川社詩選』, 「詠松燈」, 순천대박물관소장본. 5) 王師覺, 「春日華嚴寺」『開城家稿』卷二. 6) 김영붕, 『매천 황현 시와 사상』, 보고사. 124. 7) 김영붕, 『매천 황현 시와 사상』, 보고사, 423. 8) 김택영, 『開城家稿』, 「序」.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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