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난한 시절, 가난한 동네,
가난한 학교 계림초등학교에서
우리는 자랐다.
봄이면 학교 앞에서 칡뿌리를 뜯어 먹었고
여름이면 불량 쥬스를 훌쩍 훌쩍 마셨으며
겨울이면 띠기 장수 앞에서 옹기종기 모였다.
밥을 먹지 못했다.
월사금을 내지 못해 허구헌 날 학교에서 쫒겨났다.
찢어지게 가난했던 시절
우리를 살린 것은 미국이 준 옥수수 빵이었다.
빈 배를 물로 채우던 아이가
무슨 힘으로 공을 차고
무슨 힘으로 공을 던졌을까?
나는 축구 대표 선수로 뛰었고
친구는 농구 대표 선수로 뛰었다.
1970년 그 긴 여름, 해질녁까지
우리는 땀을 뻘뻘 흘리면서 뛰었다.
중학교에 올라가면서
나는 극빈의 고리에서 벗어났는데
친구는 중학교에 올라가서도 힘들었나 보다.
친구가 광주상고를 간 것은 빈곤을 탈출하기 위한 선택이었을 것이다.
광주상고를 수석으로 졸업했으니
친구가 들어갈 대학은 서울 상대였는데
조용히 한국은행에 발을 디뎠다.
1980년 광주 학살을 목격하고
우리가 있어야 할 곳은 현장이었다.
1987년 여름, 대파업이 해일처럼 한반도를 강타했고
비 온 후 죽순처럼
민주노조가 천지를 덮어버렸다.
나는 인민노련을 이끌었고
친구는 IBM 노조를 이끌었다.
우리가 만난 것은 1995년 전후였을 것이다.
그때 나는 <진보정당 추진위>에 목을 메고 있었고
친구는 <균형사회를 위한 모임>을 이끌고 있었다.
2002년 우리는 마침내 민주노동당에서 만났다.
젊은 시절, 친구의 외모는 눈부셨다.
조각상 아폴론 보다 더 눈부셨다.
그 찬란한 얼굴이 이렇게 망가졌으니
........
세월이란 이런 것인가.
외모는 망가졌어도
변하지 않는 붉은 마음이 친구에게 있음을 확인한다.
자발적 가난,
생태와 함께 하는 삶,
공동체적 삶의 지향
친구가 지향하는 가치는 이런 것이라고 나는 알고 있다.
오랫동안 나는 친구의 이름을 풀이하지 못하여 애를 먹었다.
무성(無性)이라.
No Sex인가?
No Self인가?
No nature인가?
소설 <앵벌이>를 들고
친구는 오늘 우리 앞에 나섰다.
앵벌이는 거지의 일종이다.
거지는 Proletariat의 한 범주에 속한다.
나는 오늘 무성의 참 뜻을 알게 되었다.
무성은 無聲이었다.
풀이하자면 무산자의 소리, 무산자의 외침.
The Voice of Proletariat.
앞을 내다보니
우리가 이 땅에 태어나 입은 혜택을 돌려주는 봉사의 시간은 많지 않다.
죽는 그 날까지
친구로부터
무산자의 외침을 듣게 되길 희망한다.
2020년 12월 11일
벗 황광우 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