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동고송 신간, 황광우 『빨치산 리포트』 발간되다
이번 7월에 황광우 작가의 신간이 출간되었다. ‘역사의 구름 속에 자취를 감춘 전설의 빨치산 총사령관 김선우에 바치는 헌사’라는 부제가 달렸다. 황광우 작가의 이야기는 이렇다.
우리는 빨치산의 이야기를 소설로 읽었다. 이태의 『남부군』에서 전설의 빨치산 이현상의 이야기를 들었고, 조정래의 『태백산맥』에서 소년돌격대 박현채의 이야기를 들었으며, 정지아의 『아버지의 해방일지』에서 정운창의 노후에 관한 이야기를 들었다. 첫 만남은 강렬했다. 우리는 이태의 글을 읽고 빨치산의 거점은 지리산이고, 빨치산의 영수는 이현상인 것으로 알았다.
조정래 소설의 주인공들은 모두 보성과 벌교, 구례와 광주 사람들임에도 불구하고, 빨치산의 활동 거점이 ‘태백산맥’이라는 허위의식을 조장하였다. 아니었다. 빨치산의 거점은 지리산이 아니라 백아산이었고, 빨치산의 주력은 남부군이 아니라 전남인민유격대였으며, 빨치산의 영수는 이현상이 아니라 김선우였다.
70년의 세월이 흘렀다. 이제 잘못 읽은 소설, 잘못 읽은 역사를 버릴 때가 되었다. 『해방전후사의 인식』을 버릴 때가 되었다. 그날 이곳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사실부터 다시 알자. 미국무성 문서보관소에서 묻혀 있던 비밀 문서, 한국경찰이 미국에게 올린 <Daily Report>가 마침내 공개된다.
작가 황광우는 말한다. “영문으로 된 토벌대의 일일 보고서를 읽었습니다. 저부터 놀랐습니다. 전체 6만여 명의 빨치산 희생자들 가운데 호남이 62%를 점하였습니다.” 과연 <Daily Report>는 잃어버린 현대사의 고리였다. 빨치산의 기지(Base Camp)는 지리산이 아니라 백아산이었고, 빨치산의 중심은 전남인민유격대 총사령관 김선우였다.
“해만 떨어지면 많은 동지들이 서로를 피해 산 구석에 앉아 훌쩍이며 눈물을 흘렸다. 그런 광경을 목격하면 서로 자리를 피해 주는 것이 관행이었다.”(박현채 회고)
“전쟁이 장기화할수록 지하공작은 중요합니다. 소년을 거지로 가장시켜 내려보내는 방법을 연구하세요.” (김선우 편지)
“젊은이들은 산으로 올라갔다. 산은 청년들의 피난처였고, 산속을 헤집고 다니다 죽은 빨치산의 삶은 ‘역사 앞에 죄를 짓지 않겠다는 젊은이들의 순교’였다. 백아산(白鵝山)이 늘 구름 속에 숨듯이 총사령관 김선우는 역사의 구름 속에 숨어 자취를 감추었다.”(정인 씀)
김선우 총사령관에게 바치는 헌사(獻辭)
1951년 2월부터 12월까지 매달 4천 명이 죽어갔다. 함평에서, 장성에서, 영광에서, 나주에서, 영암에서, 장흥에서, 보성에서, 구례에서, 곡성에서, 화순에서, 순창에서…. 전라도 황토가 ‘광주학살’ 보다 더한 피로 적셨다. 1951년 12월, 산사람들은 엄숙한 계절 앞에 섰다. 산사람들에게 가장 처참한 시기가 왔다. 미8군 사령관 제임스 밴 플리트 장군이 백선엽에게 토벌 작전을 맡겼다. 백선엽은 지리산 주변 9개 군을 가리키며 “이 안에 있는 사람은 다 적”이라며 소탕할 것을 지시했다. 혹한과 적설이 빨치산들을 괴롭혔다. 부상자와 동상자가 속출했다. 총에 맞아 죽고, 굶어서 죽고, 얼어서 죽었다.
백선엽 사령부는 다음과 같은 전과를 발표하였다. ‘사살: 5,009명, 생포: 3,968명ʼ 휴전협정이 체결될 무렵 1953년 7월 27일, 1천여 명의 유격대원이 생존하였다. 북은 빨치산을 외면했다. 휴전협정 문서에는 후방에 남은 물자와 장비의 철거에 관한 조문까지 있었지만, 후방에 남은 살아 있는 인간에 대한 배려는 없었다. 1951년 8월 이현상의 남부군이 지리산 달뜨기 마을에 도착했을 때, 남부군의 수는 400명이었다. 그때 전남인민유격대 총사령관 김선우는 5천 명이 넘는 유격대원을 지휘하고 있었다. 이현상이 빨치산의 상징이었다면, 빨치산의 중심은 김선우였다. 1954년 4월 5일, 김선우는 백운산 상봉에서 구름 속으로 사라졌다. 누가 그의 고뇌를 기억할까? 김선우의 최후를 노래하는 일은 언젠가 올 미래의 시인에게 맡겨야 할 것 같다. 지금은 눈 내리고 매화 향기 홀로 가득하니 여기 가난한 노래의 씨를 뿌릴 따름이다. 빨치산의 고뇌와 희생에 값하는 보답은 문학밖에 없지 않은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