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월출산 바람결, 동고송 영암 가을답사
푸른 하늘이 드높은 주말(10월 10일~11일)에 국가유산청이 주관한 답사를 다녀왔다. 동고송 회원 22명은 산세가 수려한 월출산 아래 구림마을을 찾았다. 500년 세월이 고스란히 담긴 이곳에서 왕인박사와 도선국사 같은 위대한 선현들이 나왔다. 바람에 일렁이는 황금빛 들판이 눈부셨다. 이웃들의 담장 사이 고샅길을 걷는 회원들의 발걸음이 경쾌하였다.
나무숲길 ‘기찬묏길’을 걸으며 김창조 선생의 정신이 담긴 <가야금산조 기념관>을 들렀다. 고풍스러운 ‘조종수 가옥’에 들어서자 뒷산 소나무 숲이 푸르렀다. “더우면 꽃피고, 추우면 잎 지거늘, 솔아 너는 어찌 눈서리 모르는가, 구천(九泉)에 뿌리 곧은 줄 그로 하여 아노라” 누군가 뒤에서 오우가에 나온 소나무를 읊조렸다.
단정하게 유생복으로 차려입고 선조들이 책을 엮던 ‘전통책만들기’를 따라해 보았다. 저마다 가슴에 담은 정취를 시어와 산문으로 엮어 낭독하기도 했다. 해가 뉘엿뉘엿 저물어가자 ‘회사정’ 정자에 앉아 풍류의 시간을 즐겼다. 가야금 선율에 맞춰 춤사위가 펼쳐지고 젊은 소리꾼이 현대적 감성으로 ‘쑥대머리’ 창가를 불렀다. 절로 환호성 섞인 박수갈채가 터졌다. 전통의 깊이에 새로운 숨결이 샘솟았다. 그날 밤 우리가 묵은 낭주최씨 종부댁은 소담한 품격을 갖추고 있었다. 종부댁이 차려놓은 음식들은 정갈하였다.
이튿날, 가을비가 세차게 내렸다. 우리는 조선시대 삼당(三唐) 시인으로 이름난 ‘고죽 최경창’이 기거했던 ‘고죽사’를 거쳐 ‘죽림정’에 이르렀다. 호남의 꼿꼿한 의병정신과 함께 충무공이 영암의 현덕승에게 보낸 편지 속 “약무호남 시무국가(若無湖南 是無國家), 호남이 없었다면 나라도 없었을 것이다”라는 구절을 다시 익혔다.
준엄한 역사의 울림에 옷깃을 여미었다. 천년 고찰 ‘도갑사’ 산사와 보물로 지정된 정자 ‘영보정’ 마루에 앉아 깊어 가는 앞산을 바라보았다. 이틀 동안 보람 있게 보낸 이번 영암 답사는 내용과 형식이 잘 어우러져 ‘군자빈빈(君子彬彬)’을 생각하게 하였다.
|
|
|
- 2026년 광산아카데미 10월 강연
‘고향 담양 산천에서 건져 올린 영감-이이남의 미디어 아트’
2026년 10월 15일(목), 광산문화예술회관 300여 객석이 가득 채워지며 광산아카데미 10월 강연이 열렸다. ‘미디어아트와 나’라는 주제로 마이크를 잡은 이이남 작가는, 차가운 디지털 기법이 어떻게 따뜻한 예술로 피어나는지 그 여정을 잔잔한 영상과 함께 풀어내었다.
그의 작업은 멈춰 있는 그림에 시간과 숨을 불어넣는 일이다. 보이지 않는 이미지를 눈앞에 불러오고, 들리지 않는 소리를 마음으로 듣게 만드는 힘이 화면에서 기운생동 할 때마다 함께한 시민들의 탄성이 높았다. 정지된 회화가 유연하게 말을 건네는 동안, 청중의 시선은 자연스럽게 미디어 예술의 세계로 스며들었다.
이이남 작가의 작품은 ‘이미지를 눈앞에 불러오고, 소리를 마음으로 듣게’ 하였다. 멈춰 있는 회화에 숨을 불어넣으며 청중의 시선을 한 차원 높은 곳으로 이끌었다. 백남준의 뒤를 잇는 미디어 아트의 선구자로 불리는 이이남 작가는 자신의 모든 작품의 영감은 어린 시절 고향 마을 담양의 산천에 있었노라고 나지막이 고백하였다.
첨단의 디지털 기법 위에 인문의 숨결을 얹고, 정적인 그림에 생명을 불어넣는 생생한 작품들은 모두에게 신선하였다. 객석을 가득 채운 시민들은 따뜻한 성원의 박수를 작가에게 오래도록 보냈다. |
|
|
- 서울시 정근식 교육감・전남광주 김대중 교육감
‘동고송’과 함께 역사・인문 교육 방안 논의
동고송은 최근 전남광주통합특별시 교육청에서 김대중 교육감과 뜻깊은 면담 자리를 가졌다. 이번 면담은 지역의 역사적 가치를 교육 현장에 깊이 뿌리내리고, 미래 세대를 위한 인문・역사 교육의 실천 방안을 모색하기 위해 마련되었다.
이 자리에서 동고송은 올바른 역사 인식을 확립하기 위한 두 가지 핵심 과제를 교육청에 제안했다. 첫째는 5·18 민주화운동의 역사적 가치를 전국적으로 확산하는 ‘전국화’였고, 둘째는 다가오는 광주학생독립운동 100주년 기념사업의 체계적이고 내실 있는 준비였다. 이에 대해 김대중 교육감은 새로 제정된 ‘민주시민교육법’에 발맞추어 단계적이고 체계적인 교육 과정을 실천하겠다고 밝혔다. 아울러 서울시교육청과의 긴밀한 연계를 통해 광주학생독립운동의 숭고한 역사적 의미를 전국으로 확산하는 데 온 힘을 쏟겠다고 화답했다.
김대중 교육감은 특별히 동고송이 그동안 이어온 ‘인문 의향’ 활동에 깊은 공감과 감동을 표명했다. 그러면서 “한말 의병 운동부터 5·18 광주에 이르는 자랑스러운 우리 역사를 후세가 생생히 체험하고 배울 수 있는 공간을 반드시 마련하겠다”라고 약조했다. 또한, 학교 현장에서 인성 함양과 사고력 증진을 위한 고전 교육의 중요성에 깊이 공감하며, 학생들이 깊이 있는 ‘생각의 힘’을 기를 수 있도록 관련 부서와 적극적으로 협의해 나가겠다고 덧붙였다.
한편, 서울시교육청 정근식 교육감과의 면담에서도 이 같은 제안과 구체적인 실천 방안들이 심도 있게 논의되었으며, 양 기관은 역사와 인문 가치를 중심에 둔 교육 확산에 뜻을 모았다. |
|
|
- 성진회 창립 100주년에 우리가 할 일은 무엇인가?
“왜곡된 광주학생독립운동의 진실을 바로 세우자” - 황광우 작가
서울에 가면 서대문형무소역사관이 있다. 해마다 80만 명의 학생들이 이곳을 찾아온다. 그런데 이곳에 광주가 없다. 유관순도 있고, 임시정부도 있는데 광주가 없다. 6.10만세운동도 있고, 신간회도 있는데, 광주가 없다. 광주학생독립운동이 통째로 사라지고 없다. 나는 수차례 항의했건만, 공무원들은 무사태평이다. 안동에 가면 경상북도독립기념관이 있다. 참 잘 만들어 놓았다. 그런데 이곳에도 광주가 없다. 6.10만세운동도 있고, 신간회도 있는데, 광주가 없다.
그 살벌하던 식민지 무단정치 상황에서 전국의 320개 학교에서 “식민지 노예교육을 철폐하라.”, “구속 학우 석방하라.”고 외친 것은 실로 경이로운 거족적 항거였다. 그랬다. 제2의 ‘3.1만세운동’이라 일컬어지는 ‘광주학생독립운동’은 광주만의 투쟁이 아니었다. 전라도에서 41개 학교가 참여했고, 서울에서 56개 학교가 참여했다. 뿐만이 아니다. 평양과 함북에서 무려 117개 학교가 참여했으며, 간도에서도 32개 학교가 동참하였다. 참으로 눈물겨운 온 겨레의 거국적 항거였다. 희한한 일이다. 그런데 이 장대한 투쟁을 이끈 주역이 누구냐고 물으면 우리는 답하지 못한다. 3.1만세운동 하면 유관순이 떠오르고, 청산리 대첩 하면 김좌진이 떠오르는데, ‘광주학생독립운동’의 경우엔 떠오르는 사람이 없다. 왜 이럴까?
1974년 광주일고 1학년 학생이었던 나는, 점심시간이면 뜨락으로 가서 학생탑 전면에 새겨진 청동 부조를 만졌다. 선배님들의 성난 모습, 그 얼굴을 만지며 자랐다. 하지만, 그 누구도 어느 교사도 선배들의 이름을 알려주지 않았다. 우리 광주일고생은 선배들이 일제에 항거했던 것처럼, 유신체제에 항거하는 시위를 벌였다. 그렇게 독립의 강물은 민주의 바다로 이어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선배들의 이름을 모르고 살았다. 안동의 권오설은 알면서 광주의 장재성을 몰랐다. 밀양의 김원봉은 알면서 정작 광주의 장석천을 몰랐다. 내가 그 주인공의 이름을 알게 된 것이 2021년 즈음의 일이었으니 청춘은 가고 백발의 노인이 되고서야 알게 된 것이다.
학생독립운동을 이끈 주역들의 이름이 왜 지하 깊은 곳에 매장되어 있었던가? 우리의 현실은 왜 이렇게 비참한가? 왜 호남은 역사에서마저도 차별받아야 하는가? 누구 탓인가? “일본인 중학생 후쿠다가 박기옥의 댕기머리를 잡아당겼고, 박준채가 후쿠다와 격투를 벌였다. 그리고 광주역에서 일본인 학생과 조선인 학생 간에 패싸움이 일어났다. 그로 인해 광주학생독립운동이 시작되었다”고 우리는 배웠다. 지금도 그렇게 가르친다. (<한국사>, 금성출판사, 196쪽)
이 역사 서술이 문제였다. 아니다. 광주학생독립운동은 나주역 사건 때문에 발발한 것이 아니다. 1926년 11월 3일, 16인의 학생들은 성진회를 결성하였다. 광주학생독립운동은 일본제국주의의 굴레로부터 벗어나자고 모인 16인 학생들의 결의에서 시작된 것이다. 이후 1928년, 대대적인 동맹휴학투쟁을 전개했으니, 이는 1929년 대시위의 전초전이었다. 1929년 5월, 장재성이 돌연 일본 유학을 포기하고 돌아온다. 돌아와 만든 조직이 독서회였다. 독서회 회원들은 1929년 7월, 무등산 중머릿재에서 시위 연습을 하였다. 그렇게 하여 일어난 것이 11월 3일의 대시위와 11월 12일의 2차 시위였다. 그렇다면 광주 시위의 주역은 장재성이었다. 이후 경성에서 12월 9일 시위가 터졌고, 이듬해 1월 15일 종로 거리를 함성으로 뒤엎었으니 학생독립운동을 전국으로 확산시킨 주역은 성진회의 지도자 장석천이었다.
나는 묻는다. 우리의 기억 속에서 장석천을 지운 자는 누구인가? 우리의 기억 속에서 장재성을 지운 자는 누구인가? 우리의 기억 속에서 성진회를 지운 자는 누구인가?
당시 언론은 식민 지배체제를 엎어버리기 위해 일어섰던 장대한 거족적 혁명 투쟁을 나주의 성희롱 사건으로 도치시켰다. 조선인 학생과 일본인 학생들의 패싸움으로 축소시켰다. 지금도 우리가 광주학생독립운동의 진실을 모르는 까닭은 우리가 이 ‘댕기머리 프레임’에 갇혀 있기 때문이다. 이제 우리부터 왜곡된 역사 인식 틀을 바로 잡자. 광주학생독립운동은 성진회가 일으킨 운동이었다. 이것이 역사의 진실이다. 역사의 진실을 바로 세우는 것, 이것이 성진회 창립 100주년에 해야 할 우리의 일이 아닐까? |
|
|
- 고전의 향연, ‘동고송 고전문학반’
글 읽는 소리 낭랑한 동고송 고전문학반에서 『구소수간』 소동파 편지 한 편을 읽었다. ‘요명략에게 답하는 글’에서 “공의는 뚜렷한데 명예와 치욕은 끝내 어디에 있는 것일까? 그 나머지 일이야 모두 꿈속에서 오가는 일들이고 어찌 모기가 눈앞을 지나는 것 정도만 하랴!(公議皎然, 榮辱竟安在? 其餘夢幻去來, 何是蚊虻之過也.)”
소동파는 만절(晩節)의 공명(功名)에 대해 제자 요명략에게 이야기했다. 고난을 겪는 사람에게 칭찬이나 비난, 권세나 치욕은 벌레 한 마리가 눈앞을 스윽 지나가는 것 정도의 찰나이고 뜬구름임을, 소동파는 초연한 자세로 들려주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세상을 뜬 소동파는 “사랑은 수고로움을, 충직한 마음은 깨달음을 주는 것(愛之, 能勿勞乎? 忠焉, 能勿誨乎)”임을 제자에게 주는 편지에 곡진하게 남겼다.
이어 ‘소동파의 여인들’을 배우며 중국 문학사의 유명한 만사(晩詞), 도망시(悼亡詩)인 ‘우중화만(雨中花慢)’, ‘증조운(贈朝雲)’, ‘강성자을묘정월(江城子乙卯正月)’ 등 몇 편을 암송하였다. 소동파는 왕불과 왕윤지, 왕조운 세 여인에게 애절한 자신의 극적 서사를 남겼다. 고전을 통해 천년의 먼 사람을 벗 삼으며 우리는 아름다운 생의 순간들을 함께 느낀다. 고전의 힘은 그런 것이리라. 동고송 회원들이여, ‘고전문학반’ 문을 두드리시라. |
|
|
◈ 황광우 작가의 산책길
적벽 가는 길
그대, 적벽의 숨은 곳, 은지(隱地)를 보았는가?
작년 봄 10여 인의 방랑자들이 모여 살면서 누군가에게도 토로하지 못한 내 삶의 비밀을 적어 보자고, 자서전을 써 보자고 만나 맺은 인연이 있었으니 그 이름을 ‘문우회’(文友會)로 하였다. “글로 만나 벗이 되고, 벗이 만나 인을 돕자.(以文會友, 以友輔仁)”고 말한 증자의 문구를 카피하여 ‘문우회’ 석 자 이름을 지었다. 우리는 이 소중한 인연을 이대로 풀어버리긴 너무 아쉬어 두어 달에 한 번씩 소풍을 간다. |
|
|
오병수, 정동만, 김은숙, 정순덕, 강상철, 손홍식, 하영애, 이정란, 나명룡, 유미정 |
|
|
이번에는 화순 이서에서 만났다. 아침 햇살이 하도 청량하여 우리는 일어서는 기운을 참지 못하고 500년 묵은 회나무 앞에서 포즈를 잡았다. 어떤가? ‘역발산기개세(力拔山氣蓋世)’, 산을 들어 올릴 기세 아닌가? 버스는 ‘적벽’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나는 ‘물염적벽’도 보았고, ‘창랑적벽’도 보았으나 ‘화순적벽’은 이번이 처음이다. 세상의 때에 물들지 말자, 물염(勿染) 적벽에서는 김삿갓을 만날 수 있어 좋고, 창랑 적벽은 굴원의 <어부사>를 회상할 수 있어 좋았다. 하지만 노루목 적벽을 갈 수 없었다. 이번은 50년 묵은 원을 푸는 탐방이다. 마침내 버스는 시동을 걸었다. ‘머라머라’ 안내원이 하는 말은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무심코 버스가 멈추어 섰는데, 나는 눈앞에 펼쳐진 천하절경에 압도되어 버렸다. 이곳이 노루목 적벽이요, 한자어로 ‘장항적벽’이다. |
|
|
김은숙, 정순덕, 하영애, 강상철, 유미정, 정동만, 나명룡, 손홍식, 이정란, 오병수 |
|
|
옹성산 한 줄기가 수몰된 동복천 아래로 이어졌고, 저 멀리엔 백아산 하늘바위가 아슴푸레 시야에 들어왔다. 오른편엔 천문을 관찰하는 망대가 솟아있는 산이 시야에 들어왔으니, 그 산의 자태로 보아 ‘모후산’임이 분명하였다. 옹성산이 동복의 물가로 내려오는 지점엔 층상 모양의 절벽이 태고의 비밀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었다. 저 골짜기를 오르면 한산사라는 절이 있었다고 한다. 옹성산 너머엔 백아산에서 화순 탄광의 사평으로 가는 큰길이 나온다. 이즈음, 나는 1952년 봄, 무등산과 백아산을 오고 가며 뛰었던 소년 빨치산 박현채를 아니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
|
|
그날은 소년이 사평으로 보급투쟁을 나간 날이었다. 냄새 풀풀 풍기는 신김치에 정신이 팔렸을까? 김치 한 가닥을 씹으면서 나와 보니 대오는 간데 없고, 소년 혼자 댕그라니 남았다. 오던 길을 되돌아가면 되는데, 아뿔사, 당황한 소년의 발길은 무등산 쪽을 향했다. 가도 가도 대원들은 나타나지 않았다. 길가엔 죽은 빨치산들의 시체가 즐비했다. 꾀꼬리들이 소년을 따라왔다. 무동 근처에 오니 불에 탄 마을이 나왔고, 그곳에서 깨진 옹기에 밥을 지어 먹었다. 소년은 백아산 북면에 자리를 잡고 있던 본대에 귀환하였다.
그러니까 소년 박현채가 헤매고 다닌 곳을 그리면 평행사변형이 되다. 이 평행사변형 네모 안에 흐르고 있는 천이 동복천이요, 네모 안을 꽉 채우고 있는 지형이 오늘 우리가 탐방하는 적벽이었다. 물염 적벽도 좋고, 창랑 적벽도 좋지만 화순 적벽은 무릉도원, 천하의 별유천지였다. 왜 이 아름다운 곳에서 가장 슬픈 일들이 벌어졌던가? |
|
|
안내자에 의하면 2000년 전 이곳은 소도(蘇塗)였다고 한다. 죄를 지은 수배자가 이곳에 오면 숨겨준 곳. 그러니까 이곳은 신성한 곳이었다. 천하에 맑은 곳, 깨끗한 영혼들이 보호받는 곳, 나는 소도의 뜻을 알 수 있었다. |
|
|
돌아오는 길에 나는 정동만 샘께 살짝 물었다.
“오늘 점심은 뭘 먹는답니까?”
“오리구이에 닭백숙 예약했어요.”
“어찌깨라? 나는 메기탕을 좋아해요. 내가 잘 아는 이서 매운탕 집이 있거든요. 그 집에서 매운탕을 시켜 먹으면 안 될까요?”
정동만 샘은 주인에게 먼저 동의를 구하고 나서 매운탕을 배달해 먹자고 제안했다. 역시 예의바른 신사였다.
“어저께 예약한 사람인디요. 오리구이, 닭백숙을 못 먹는 분이 있어서 그런디 메기매운탕을 배달해서 먹으면 안 될까요?”
“우리 집에서도 메기매운탕을 해요.”
2008년에서 2017년까지 무려 10년 동안 나는 아내와 함께 매주 서너 번 무등산 뒤를 돌아 이곳 이서에 와서 메기매운탕을 먹었다. 언젠가 그 추억의 집이 사라져서 못내 서운했다. 12시가 되어 버스에서 내린 우리는 예약했던 ‘이서가든’으로 갔다. 오! 마이 갓!. 이서가든의 여사장은 내가 자주 가던 메기탕 집의 그 여사장이었다. 적벽의 문이 열리고, 매일 두 대의 손님들이 이곳에서 밥을 먹다 보니, 혼자서 운영하던 시골 밥집이 네 명의 일꾼을 고용한 큰 식당으로 변모한 것이다. 옛적의 시골스러움은 사라졌지만 그래도 사업이 번창하여 차린 ‘이서가든’은 여전히 반가웠다. 이제 한 달에 한 번은 이곳을 찾으련다. |
|
|
이어 나는 해남으로 갔다. 황지우의 ‘주경야독’이 있기 때문이다. 나는 형의 강의를 들으러 가는 것이 아니라, 한 자궁에서 태어난 핏줄의 그리움 때문에 해남에 간다. 함께 가고 싶으면 언제든 연락하시라. |
|
|
□ 동고송 행사 안내
▪2026년 광산아카데미 11월 강연 |
|
|
▪성진회 100주년 학술행사
일시 2026년 12월 17일(목) 오후 3시
장소 245전일빌딩 9층 대강당
▪광산인생자서전 2기 출간례
일시 2026년 11월 12일(목) 오후 2시
장소 보건대학교 두란노홀
▪2027년 유럽인문기행 |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