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재성 동고송 원고 2019년 10월 조봉암과 조국 한 권의 인물평전을 쓰기 위해서는 자료조사부터 시작해 생존한 관련자들을 면담하고 집필한 후 관련자들에게 읽혀 보고 수정하는데 최소한 1년은 걸리기 마련이다. 거의 아무런 경제적 대가 없이 작가의 생애 1년을 바치게 하려면 평전으로 써주어야 할 충분한 이유가 있어야 할 것이다. 내게 들어오는 집필 요청 중에도 자료수집과 공부까지 하고나서 포기한 경우가 여러 번이다. 지난 호에는 출판사와 계약까지 했다가 취소한 김원봉평전을 이야기했는데, 요즘 법무부장관 조국에 관련한 정쟁을 보니 문득 조봉암평전을 포기한 기억이 떠오른다. 조봉암은 내가 존경하는 몇 안 되는 선배운동가다. 굳이 비교하자면 김원봉보다 한결 명확한 사상과 실천력을 가진 사람이었다. 그는 여운형과 함께 한국공산주의운동의 1세대로서 사회주의 이론을 도입하고, 조선공산당 결성과 운영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던 사람이다. 그러나 1930년대 후반 들어 소련이 스탈린의 교조주의와 공산당의 관료주의에 의해 최악의 독재국가이자 빈민국가로 전락하는 것을 보며 유럽식 사회민주주의로 선회한다. 해방 후에는 조선공산당과 결별하고 진보당을 만들어 북한 체제를 비판하고 사회민주주의를 주창하여 유력한 대통령후보로 선전했으나 이승만에 의해 북한의 간첩이라는 누명을 쓰고 처형된다. 자료를 수집하고 공부까지 한 후에 조봉암평전을 포기한 것은 이미 그에 관한 책이 여러 권 나와 있었기 때문이었다. 다른 이유는 없다. 김원봉의 경우와 달리, 조봉암의 사상과 정치행로는 충분히 공감할 수 있었기에 꼭 써주고 싶었는데 조봉암이란 이름은 이미 충분히 알려졌기에, 굳이 나의 1년을 쏟고 싶지 않았을 뿐이다. 그런데 소위 ‘조국 사태’를 보며 갑자기 조봉암을 떠올린 이유는 무엇일까? 조봉암은 이승만정부의 초대 농림부장관에 임명되었다가 야당인 민주당의 줄기찬 공격으로 6개월 만에 물러난 일이 있기 때문이다. 해방 당시, 한국의 농토는 대부분 중·대지주들에게 집중되어 있었다. 아시아의 다른 나라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소련이 자기네 점령 국가에서 무상몰수, 무상분배의 토지개혁을 실시하자 미국도 자신이 점령한 국가에서 토지개혁을 서두른다. 단, 자본주의 원칙에 따라 유상몰수, 유상분배였다. 남한의 미군 장교들도 이 원칙에 따라 1인당 최대 9천 평까지만 소유할 수 있게 하고 나머지는 몰수해 땅 없는 소작인들에게 분배하되 토지 대금은 10년 간 분할 상환하도록 하여 부담을 줄인다는 제안서를 작성한다. 초대대통령 이승만은 미국의 제안에 따라 토지개혁을 수행할 적임자로 사회민주주의자 조봉암을 선택한다. 농림부장관이 된 조봉암은 미국의 안을 그대로 추진하되 농민들의 요청에 따라 토지대금 상환을 5년으로 줄이는 등 보다 현실화한다. 이에 극렬히 반발한 것은 지주들이 주도하던 민주당이었다. 해방직후 한국민주당으로 출범해 이승만과 손을 잡았던 지주와 지식인들은 민주국민당을 결성해 이승만과 결별하고 조봉암을 맹렬히 공격했다. 비난 사유는 그가 낡은 장관 관사를 고치는데 공금을 썼다는 등, 사적인 이익과는 아무 상관없는 일들이었지만 억지 투쟁으로 국회를 마비시켰고, 이승만은 6개월 만에 조봉암을 경질한다. 이렇듯, 이승만의 토지개혁이란 사실상 미국의 작품이었으나 결과적으로 조봉암을 국민적 영웅으로 만들었고, 조봉암이 이 인기를 바탕으로 대선에 출마해 2위까지 하자 위기를 느낀 이승만이 죽여 버린 것이다. 조봉암의 죽음은 이승만의 간악함과 민주당의 위선이 합쳐진 사법살인이었다. 역사란 보면 볼수록 요지경이다. 60년 전에 조봉암을 죽였던 사법부가 이번에는 민주당 정권의 법무부장관을 죽이겠다고 난리다. 무소불위 권력을 누리는 검찰을 제어하기 위한 사법개혁을 저지하기 위함이다. 정치인끼리 서로 욕만 한 마디해도 고소해 검사들에게 스스로 권력을 주면서 어떻게 사법개혁을 하겠다는 건지 잘 모르겠지만, 아무튼 검찰의 조국 장관 신상 털기는 지나쳐도 너무 지나치다. 정확한 내막을 알지 못하지만 최대한 호의적으로 해석하자면, 조국 장관도, 그의 가족도 실정법을 어기지는 않았을 것이다. 다만, 부유하게 살아가는 고급 지식인 집안에서 흔히 벌어지는 대학입시를 위한 남다른 노력과 여유자금 투자방식이 서민들에게 괴리감을 주었고, 야당과 검찰은 이런 분위기를 악용해 노골적인 반정부운동을 벌이는 것으로 보인다. 훨씬 덜 한 가족문제로도 도덕적 책임을 인정하고 장관직에서 사퇴했던 전례들을 생각하면 조국 장관이 하루 빨리 퇴진하는 게 옳은 것 같다. 그러나 검찰 권력의 축소는 꼭 필요하거니와 범죄를 저지른 것도 아닌데 장관직을 포기하면 보수 세력에 백기를 드는 꼴이니 안 되겠다. 사정이 이러니 내 주변에도 서초동의 조국 지지집회에 참석한 이들도 있고, 조국이 스스로 물러나야 한다고 말하는 이들도 있다. 하지만 나는 시시때때로 변하는 상황에 따라 시사해설을 하기 보다는, 본질적인 부분을 살펴보게 된다. 과연 조봉암과 조국은 무엇이 같고, 무엇이 다른가 하는 것이다. 무슨 답을 도출한 것은 아니다. 조봉암에 대해서는 본인의 글과 전기를 통해 나름대로 공부를 했지만, 조국에 대해서는 거의 아는 게 없기 때문이다. 사노맹, 강남좌파, 민정수석, 서울대 교수, 수십 억대 재산 등 별로 호감이 가지 않는 대명사들로만 알고 있을 뿐이다. 함부로 조국에 대한 평가를 해서는 안 되는 이유이다. 극빈한 소작농 출신으로 평생 가난한 떠돌이 생활을 하면서 10년 가까운 감옥살이로 동상에 걸려 여러 개 손가락 마디를 잃은 조봉암. 동지들로부터는 배신자로 비난 받고 보수들로부터는 빨갱이로 비난받으면서도 보다 인간적인 사회주의를 주창해 다수 국민을 설득해 냈던 조봉암. 진보운동가이면서도 당시 소련과 북한의 오류를 직선적으로 비판할 수 있던 눈치 보지 않는 정치인 조봉암. 그가 그립다. 김창숙과 함께 경북의 대표적인 독립운동가이던 이동하는 해방 후에도 적산가옥 불하조차도 거부하고 가난하게 살다 죽는 사람이다. 조봉암은 진보당을 조직하려고 대구에 올 때마다 이동하의 집에서 잤는데, 술을 무척 좋아하는 호탕한 사람이었다고 한다. 이동하의 며느리는 조봉암이 술기운으로 붉은 딸기코였는데, 아이들까지도 조봉암을 그렇게 좋아했다고 기억한다. 문득, 조봉암평전을 써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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