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끄러운 나의 5·18 - 김동민 (사)인문연구원 동고송 회원 - ‘횃불행진’을 하다! 1980년 5·16일 오후 8시경 우리 대학생들은 민주대성회가 거행되는 도청 광장을 출발했다. 횃불을 들고 행진을 하였다. 오후 8시부터 횃불시위대는 두 갈래로 흩어져 광주 시내를 행진하였다. 한 팀은 도청 광장→노동청→광주MBC→광주고등학교→무등산장→산수오거리→법원→동명로로 이동했다가 다시 도청 광장으로 돌아왔고, 또 다른 팀은 금남로→유동삼거리→광주천을 통하여 다시 금남로를 통해 밤 10시쯤 도청 광장으로 복귀했다. 횃불시위는 광주시내 전 대학생이 참가하였다. 여대생들은 횃불시위대의 가운데에서 횃불을 들었고, 남대생들은 어깨동무를 하고 좌우에서 보호하면서 구호를 외치며 행진하였다. 광주 시내의 대로를 따라 행진했는데 홍래와 나는 한 조가 되어 참가하였다. 이 횃불시위는 광주 시민 모두가 지켜본, 세계역사상 유례가 없는 평화로운 시위였다. 1979년 12·12 이후 정국은 급변했고, 민주화는 멀어져갔다. 당시 신학기가 되면서 학내에서는 산발적인 시위가 시작되었다. 날마다 10시경이면 도서관 앞에서 4, 50명이 모여서 시국을 분석하고 구호를 외치고 정문으로 향했다. 많으면 1, 2백 명에 달했다. 최루탄이 터지고 전경들이 학내에 들어오고 학생들은 뿔뿔이 흩어지는 일이 일상화되었다. 4월이 되자 점차 많은 학생들이 참여하기 시작했다. 나의 죽마고우 홍래도 그 중의 한 사람이었다. 학생회장 선거에서 박관현이 압도적으로 당선되자 상황이 급변하기 시작했다. 박관현의 연설은 누구보다도 강렬했고 민주주의와 민족의 앞날에 대한 의지는 다른 어느 누구도 따를 수 없었다. 박관현의 당선으로 전남대 시위대들의 민주적 기상은 욱일승천하였다. 전남대 학생시위는 폭발적으로 확대되었다. 이제 시위에 참석하지 않고 공부만 한다거나 취미 생활하는 자는 더 이상 전대생의 자격이 될 수가 없었다. 민주와 독재, 분단과 통일이라는 대명제가 갑자기 시대적 사명으로 우리 모든 전대생 앞에 놓이게 되었다. 박관현은 우리에게 시위에 참가해야만 전대생이고 그래야만 역사에 사는 사람이 된다는 자부심을 불어넣어 주었다. 학생들은 주로 동창회, 서클별로 무리를 지어 시위에 참여했다. 나와 홍래는 거의 하루도 빠지지 않고 날마다 시위에 참여했다. 5월이 되어서는 전교생이 시위에 참가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나중에는 단과대학별로 조직적으로 시위에 참여했다. 광주의 모든 대학생들이 참여한 횃불시위 행진을 마치고 도청에 모이자 도청은 그야말로 발 디딜 틈이 없이 학생 시민들로 가득 찼다. 이미 해거름부터 많은 연사가 도청 분수대 위에서 현 시국에 대한 연설을 하고 민주주의의 성취와 독재 타도를 말했지만, 난 아직도 박관현이 했던 마지막 말, 삼창을 생생히 기억하고 있다. “오늘 부로 오일육은 죽어부렀다!” 우리는 모두 외쳤다. “오일육은 죽어부렀다!” 또 박관현은 말했다. “오일육은 죽어부렀다!” 우리는 또 모두 외쳤다. “오일육은 죽어부렀다!” 또 박관현은 더 크게 외쳤다. “오일육은 죽어부렀다!” 우리도 더 크게 외쳤다. “오일육은 죽어부렀다!” 그날 이후로 광주에서, 내 정신에서 “오일육은 디져부렀다!” ‘조대 뒷산’으로 피신하다. 5월 18일 일요일, 비상계엄이 전국적으로 실시되었다는데 실감이 나지 않았다. 집에 라디오 한 대가 있어 계엄령이 내린 것을 알았고, 휴교령으로 시위를 전면 금지한다는 뉴스를 들었다. 아버지는 금서를 간추려 땅에 묻어야 할지 모른다고 했다. 군에 있는 형님도 걱정된다고 어머니가 말씀하셨다. 이날 저녁 벌써 공수특전대 및 계엄군이 전대와 조대에 진입, 야영을 시작하였다고 홍래는 기억하였다. 오후에 소태동에 사는 홍래가 학운동 우리 집에 왔다. 오자마자 아무 말도 없이 잠만 잤다. 나는 물어보지도 않고 그냥 우리 집에 있겠다고 해서 그러라고 했다. 홍래 형이 조선대학교 임시 총학생회 소속으로 체포 대상이었는데, 그 일로 홍래는 화정동 505 보안대에 밤 12시 30분경에 잡혀가서 형 문제로 취조를 당했다. 겨우 풀려난 다음에 우리 집으로 피신해왔던 것이다. 홍래는 ‘자택감금조건으로 서약서를 쓰고 방면’되었으며, “7월 16일 전투경찰 입대영장을 소지하고 있었기에 그나마 혹독한 고문을 받지는 않았지만 당시 지하 감방에서 들려오는 고문 소리는 소름끼치는 아비규환을 방불케 했다”고 회상했다. 5·18 기간의 10일 동안 나는 두 번 도청에 나갔다. 첫 번째는 5월 19일인 것 같다. 오전에 혼자서 나갔다. 한바탕 시위가 끝난 금남로에는 최루탄 냄새가 가득하였고 시위대는 보이지 않았다. 금남로 3가 (구) 한국은행 건물 앞을 나는 혼자 걸어가고 있었다. 한 3, 40m 앞이든가, 대학생으로 보이는 젊은이 3명이 모여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뒤에서 지프차 한 대가 급히 다가섰고, 사복을 입은 정장차림의 사람이 몇 명 내리더니, 3명을 사정없이 곤봉으로 내리치고 발로 차며 멱살을 잡아끌고 차에 태웠다. 불법 연행이었다. 나는 혼자라서 안 잡아간 것 같고, 앞에는 3명이니 잡아간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얼른 충장로로 피해 들어갔다. 평소 자주 가는 음악다방에서 한 시간을 보냈다. 다시 충장로 입구 쪽으로 나와서 도청 쪽으로 향했다. 거기에는 일반 경찰들이 방패를 들고 로마병정들처럼 늘어서 있었다. 나를 막아선 어느 중년 경찰이 말했다. “어이, 젊은이! 어여, 빨리 집에 들어가. 지금 젊은 사람들은 다 잡아가니까. 빨리 집에 들어가!” 나는 물었다. “왜 못 가게 해요? 무슨 일이요” 경찰은 말했다. “방금 크게 한바탕 붙었어. 난리가 났는데, 어디를 돌아다니고 있어. 못 가!” 도청 앞은 최루탄 냄새만 나고 조용했다. 다방에 있는 동안 또 한바탕 충돌이 있었던 모양이었다. 광주 경찰은 아닌 모양새이기에, “어디서 왔소?” 하고 물었더니 지방에서 차출되어왔다고 했다. 그러면서 더 많은 경찰이 차출되어 광주로 올 거라고 했다. 5월 20일, 화순, 지원동쪽에서부터 보안대, 계엄군, 경찰들이 집을 뒤져 학생들은 다 체포해간다는 소문이 돌았다. 묶어둔 책, 금서 뭉치를 비닐로 싸서 긴급히 석류나무 옆 땅속에 파묻었다. 홍래와 나는 도시락을 싸서 조대 뒷산으로 피신했다. 조대 뒷산에 올라온 우리는 광주 시내를 바라보았다. 조대 뒷산은 전망이 좋아 시내가 훤히 보였다. 양영학원 옆 광주지방 노동청에서 하얀 연기가 나고 있었다. 노동청은 도청과 불과 100m 거리에 있었다. 조선대 운동장은 병영처럼 계엄군 막사가 두 줄로 나란히 펼쳐져 있었다. 시내의 상공에서는 헬리콥터가 날면서 시위 해산종용 선무방송을 하고 있었다. 5·18 민주화운동에서 노동청이 맨 먼저 불에 탔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노동청은 박 정권 당시 악질 기업들의 앞잡이였기 때문이었다. 시내 곳곳에서는 하루 종일 총소리가 들려왔다. 오후 늦게 집으로 돌아왔다. 그날 밤, MBC 방송국도 화염병 세례를 받고 불에 탔다. 5월 21일 여학생이 대형스피커로 시위 참여를 호소하는 소리를 들었다. 이날도 아침밥을 먹고 도시락을 싸들고 9시경에 조대 뒷산으로 피신하였다. 친구 홍래는 그날의 기억을 이렇게 말했다. “9시경 조대 뒷산, 숙실마을에 올라 도청 앞 상황을 예의 주시하였는데, 11시경에 금남로에 시위관중이 구름처럼 모여든 것을 보았다. 그리고 점심 무렵에 기관단총 소리와 무차별 사격 소리를 들었다.” 시내 곳곳에서 들리는 총소리, 최루탄 터지는 소리, 헬기가 조선대 운동장에서 뜨고 지는 광경, 그리고 헬기 한 대가 조종사가 보일 정도로 바로 머리 위로 바짝 달려들기에, “야, 홍래야! 우리한테 총 쏘겠다. 숨자, 숨어.”하고 얼른 뒤쪽 숲속으로 도망가 아슬아슬하게 숨었던 기억은 지금도 생생하다. 헬기는 시내를 돌아다니다 유(U)자 형태로 선회하면서 조선대 운동장으로 착륙하곤 하였다. ‘뒤주’ 속에 숨다. 그날 오후 집에 오니 아무래도 학운동 집은 위험하니 어디 다른 데, 시내 쪽으로 거처를 옮긴 것이 좋겠다고 집에서 이야기하기에, 당시 내가 아르바이트하고 있는 학생의 집이 있던 학동시장 근방으로 옮기기로 하였다. 지원동 쪽에서부터 계엄군이 올라오면서 학생들을 뒤져서 다 잡아간다는 것이었다. 주인아줌마는 우리를 반갑게 맞아주었다. 그런데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이 날이 계엄군이 철수한 날이었다. 철수하면서 길 근처 집을 뒤져 젊은이들을 다 죽인다는 소문이 또 돌았다. 하필이면 피신하는 집이 길 근처의 집이었다. 이제 갈 곳은 없고 막막하였다. 밤이 되자 거리는 쥐 죽은 듯 조용해졌다. 주인아줌마는 우리를 어디 숨길 데가 없는가 하고 생각하더니 “헌 뒤주가 있으니 둘 다 그 속에 숨으면 돼!” 하였다. 8시경이 되니까 총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도청 쪽에서 의대 쪽으로 해서 학동, 화순 방면으로 철수하는 계엄군은 그냥 조용히 철수하는 게 아니었다. 그들도 겁이 나서 아무 곳에나 마구 총을 갈기면서 철수를 하였다. 총소리가 가까워지면서 예광탄이 마구 날아다녔다. 주인아줌마는 유탄이 날아오면 맞을 수도 있으니까 두꺼운 이불을 거실 유리문 앞에 걸어 널어놓아야 한다면서 겨울이불을 꺼내 함께 널었다. 그리고 우리에게 얼른 뒤주 속으로 들어가 숨으라고 하면서 나중에 나오라고 하였다. 5월 25일, 두 번째로 도청에 나갔다. 이때는 이미 시민군이 도청을 탈환하고 매일 궐기대회를 하고 시위차량에 ‘살인마 전두환을 찢어죽이자!’는 현수막을 걸고 시내를 주행하던 때였다. 아침밥을 먹고 도청을 향해 걸어갔다. 나는 벌떼처럼 많은 사람들을 뚫고, 상황을 알아보려 도청 안으로 들어가려고 했지만 쉽지 않았다. 당시 총을 맨 시민군이 경계를 서고 있었다. “우린 어찌 되것소?” 한 아줌마가 묻자 시민군은 말했다. “지금 위에서 협상 중인디, 잘 안 되가지고 계엄군이 들어오면 다 죽어야지 별 수 있겄소. 어제도 송정리에선가 둘이나 죽었서라.” 시민군의 옷차림새는 허름했고 대학생 같지는 않았다. 그렇다고 체계적으로 지휘를 받은 전투원으로도 보이지 않았다. 투사회보가 곳곳에 뿌려지고 있었다. 오후에 독침사건이 발생했다고 들었다. 독침 소문을 퍼트린 사람을 잡아 당국에 인수했는데 안기부 프락치라는 소문도 돌았다. 5월 27일, 새벽 “도청, 시민군을 지켜 달라!, 광주를 지켜 달라!”는 애절한 방송과 함께 콩 볶는 듯이 요란한 총소리가 멀리 도청에서 들려왔다. 그리고 그 소리는 점차 잦아들었다. 아침 8시경이 되자, 군용헬기가 낮게 날며 ‘거리로 나오지 말라!’, ‘폭동은 진압되었다’는 선무방송만 되풀이 되었다. 산발적인 총소리는 오전 내내 계속되었다. 10일간의 5·18 광주민주화운동은 막을 내렸다. 5·18 이후 그 뒤로 한동안 5·18은 나에겐 없던 일이 되었다. 광주의 모든 사람들이 그랬듯이, 기억하고 싶지 않은 일이었다. 앞으로 무엇을 할 것인가. 어떻게 살 것인가. 아무리 심한 고통도 죽은 자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5·18 후에 휴교령이 내리고 9월 이후에 휴교령이 풀린다고 하였다. 홍래는 전투경찰에 입대하고 난 여름 내내 집에 있으면서 농업문제에 관한 논문을 썼다. 학도호국단이 부활되고 부단장을 맡아달라는 제안을 받았으나 거절했다. 대신에 자율적인 상경학회에서 활동하였다. 5·18이 끝난 몇 년 후, 사촌동생 경원이가 시민군에 참여한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는 당시 고등학생이었는데 트럭을 타고 다니면서 총을 들고 다녔다고 했다. “네가 뭘 안다고 그랬냐. 죽을려고.” 그랬더니, 동생은 말했다. “나 돌아다닐 때는 광주시내 조용했어라. 사람들이 밥도 주고 먹을 것도 많았 고, 재밌었는디. 위험한 외곽에는 안 갔어라. 나중에 총 반납하라고 해서 주 고 집에 왔지라.” 어렸을 때 윗집에 살던 문재학이가 죽었다는 소식도 들었다. 재학이는 동네 후배로 어렸을 때 같이 놀면서 컸다. 당시 광주상고 1학년생이던 재학이는 도청을 찾아온 어머님께 ‘친구가 죽었어요. 혼자 돌아갈 수 없습니다’라고 말하고 어머님을 돌려보냈다. 재학이 어머니는 이후 매스컴에 자주 나와 광주 5·18을 알리는데 많은 기여를 하였다. “도청 민원실 2층에서 아들하고 마주쳤어요. 가자고 해도 얼른 대답을 못해요. 한참 서 있더니 그러는 거예요. ‘엄마, 창근이가 죽었어라우. 창근이도 죽었는데 나만 혼자 집에 가면 되겠소? 친구가 죽었는데 나 혼자만 데리고 갈라우?’ 하는 거요.” “인간의 자유와 평등을 목숨 걸고 수호하려 했던 저 아름다운 5월의 전사들을 잊지 않고 끝내 기억하면서.” 들불 열사 박효선의 말로 글을 맺는다. 동고송 홈페이지에서 보기 :
https://dongosong.net/archives/6087 망월동과 나 이은주(초등학교 교사) -1- 나는 광주광역시 망월동에 산다. 망. 월. 동. 어쩐지 음산하고 무서운 곳이다. 어린 시절 유행하던 귀신 이야기 시리즈에 나오는, 하얀 소복 입은 여자가 택시에 타서 데려가 달라는 제삿날의 방문지, 망우리 공동묘지의 느낌이 드는 곳이다. 이런 이유에서였을까? 큰 딸의 초등학교 친구는 누가 어디 사냐고 물으면 절대 망월동이라 하지 않고, 청옥동이나 석곡동이라고 답한단다. 나도 오랫동안 망월동에 산다고 말하는 것을 꺼렸다. 지금은 두려워하지 않는다. “5.18 국립민주묘지가 있는 곳, 망월동에 살아요.” 친절하게 설명까지 덧붙여 말한다. 귀신이 놀랄 만한 변화다. 한때는 망자(亡子)들의 동네, 망한 동네였던 망월동이 어찌 하여 이제는 ‘달이 뜨면 더 아름다운 망월동’으로 바뀌게 되었을까? -2- 1980년 광주의 오월을 나는 전혀 알지 못했다. 그 해 5월, 영광군 군남면시골 학교의 고등학생이었던 나는 어느 날 몇 몇 친구들이 모여 수군거리는 이야기를 들었다. “광주에서 무선 일이 벌어졌시야.”, “여학생 가슴을 잘랐다메” 그때 나에겐 유언비어였다. 여고괴담에나 나오는 공포 시리즈처럼 한 때 유행하는 이야기라고만 나는 생각했다. 그 해 여름도 초등학교 때부터 행사처럼 해 온 모내기와 보리 베기 농촌 근로봉사를 하느라 학교 공부는 전혀 하지 않았다. 학생들은 늘 해오던 일이라 어느 누구도 불평하지 않았고 항의하는 학부모도 없었다. 점심으로 주는 국수 한 그릇이 감사했다. 배고픈 친구들과 함께 어느 집 마당가의 앵두를 다 따 먹어버리고 그 집 담 밑에 숨던 일이 어제 일인 듯 떠오른다. 일주일에 몇 시간씩은 군복을 입고 출근하던 교련 선생님에게 군사훈련 수업을 받았고 가을에는 줄을 맞추어 행군을 갔다. 대입 시험을 보기 위해 광주에 온 것이 1980년 11월이었다. 나는 영광 촌년이었다. 광주의 친척과 선배들이 커다란 하얀 타래엿을 들고 찾아와 주었고, 다음날 학력고사를 보았다. 도시락이 없어 근처 식당에서 점심을 먹다가 서둘러 시험장으로 뛰어 갔던 생각이 난다. 이듬 해 나는 대학생이 되어 광주에 왔다. 이후 선생님, 부모님, 친구, 내 주변 어느 누구에게서도 광주 이야기를 들어 본 적이 없다. 학교 선생님의 집에 딸린 아래채에서 자취를 했는데, 본채에서는 선생님의 대학생 아들과 재수생 아들이 살았다. 그 집 마당 가운데에 해마다 자목련이 피었고, 캠퍼스의 풍향 동산에 벚꽃이 만발하는 봄이 네 번 지나는 동안에도 나는 광주의 일에 대해 눈치도 채지 못했다. 시골에서 출세한 이 여대생은 굽 높은 구두에 핸드백은 어깨에 메고 대학 교재는 눈에 띄게 옆구리에 끼고 다녔다. 취미로 기타를 배우고 가끔 극장에서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대부’ 같은 영화를 보았다. 나는 주말이나 방학이면 시골집에 가서 동생들에게 책과 영화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대학 시절 유독 안 좋은 기억을 말하자면 추운 겨울 번개탄으로 연탄불을 지피던 일과 봄이면 거리를 자욱하게 덮는 최루탄 냄새였다. 모르는 게 약이었을까? 여기 저기 동아리를 옮겨 다녔으나 오래지 않아 그것도 싫증이 나서 혼자 공부를 했다. 별 고민 없이 대학을 다녔고 졸업 후 원하던 교직에 취직을 했다. 교사, 착한 교사이긴 했으나 돌이켜 보니 나는 생각이 없는 교사였다. -3- 1998년 무등산 아래 마을, 망월동으로 이사를 갔고 늦둥이 막내아들을 낳았다. 아들의 자칭 호가 노산(老産)이다. 뒤늦게 세상에 내놓은 자식이라는 자조 섞인 명칭이다. 아기 때부터 막내아들을 할머니 집에 맡기고 데려오던 길은 망월동 묘역을 지나 고개를 넘어 광주 시내로 들어가는 길이었다. 할머니 집에 가는 것을 싫어한 아들은 차 안에서 동그랗게 앉아 자는 척하였다. 체념한 듯 두 눈을 감고 잤다. 사남매 여섯 식구 뒤치다꺼리 끝낸 부산한 아침, 망월동 묘역을 지나가던 출근길은 고요했고, 계절마다 아름다웠다. 비가 오면 가끔 근처 시립묘지에서 번갯불이 반짝였다. 밤이 늦어도 무섭지 않았는데, 누군가 지켜 줄 것 같아 가슴 내밀고 목을 한껏 뒤로 젖힌 채 운전하던 길이었다. 한 낮의 묘역 입구엔 포장마차 꽃집 주인이 플라스틱 의자에 앉아 한정 없는 손님을 기다리고 있었다. ‘꽃을 팔아 밥벌이가 될까? 조화로 된 알록달록한 꽃 한 다발. 산 자에게 죽은 자는 어떤 의미일까?’ 생각하면서 그 길을 지나갔다. 매년 5월이면 묘역 가는 길엔 태극기 깃발이 가로수처럼 늘어섰고, 하얀 이팝 꽃 눈 내리는 그 길은 더욱 환하고 숙연했다. -4- 2011년 어느 날, 나는 아들을 할머니 집에 맡겨만 두고 돌보지 못한 것에 자책감이 들었다. 이제라도 아들 노산의 공부를 챙겨주어야겠다고 단단히 마음을 먹고 영어 학원에 상담을 하러 갔다. 응접실에 앉아 있는데 학원 수업이 끝나기를 기다리던 엄마들이 광주에 잘 가르치는 독서 선생님이 있다고 말하는 걸 듣게 되었다. 나는 노산의 자존감을 키워주기 위해서는 독서교육이 더 낫겠다 싶어 바로 독서 학원을 찾아갔다. 다산 학원이었다. 원장 선생님은 특이하게 엄마도 아이와 같이 강의를 들어보라고 했다. 뜻이 맞은 엄마들 몇이서 원장의 철학 강의를 같이 듣게 되었고, 우리는 ‘철학하는 엄마모임’이라 하여 ‘철모’를 만들게 되었다. 아이들 공부 맡기러 왔다가 엄마들이 공부를 하게 된 것이다. 이 ‘철모’ 공부모임에 지아비들이 들어와 함께 공부하는 바람에 ‘철모’는 ‘철부지’로 개명을 하게 되었으나, 2011년 창립 이래 광주의 ‘고전공부모임’은 지금도 해마다 그 연조를 쌓아가고 있다. 학창시절 책의 이름만 외웠던 호메로스, 그가 남긴 서사시《일리아스》와 《오뒷세이아》를 읽었고 노자의 《도덕경》과 공자의 《논어》도 읽었다. 《성경》을 구약 창세기에서부터 시작하여 신약의 복음서까지 다 읽었다. 동양고전과 서양고전을 번갈아 가며 공부했다. 자연스럽게 서양과 동양의 시대적 배경을 이해해야 했기 때문에 역사 공부도 하게 되었다. 고대사와 현대사, 세계사와 중국사, 국사와 근현대사를 공부하면서 거대한 역사의 흐름 속에서 과거와 현재, 미래를 예견하는 지혜를 터득하게 되었다.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에 대한 생각이 시루 속 콩나물처럼 쑥쑥 자라났다. -5- 2018년 《스물두 살 박기순 평전》을 읽게 되었다. 처음으로 1980년 오월의 전사(前史)를 알게 되었다. 박기순은 1978년 12월 25일, 야학의 아이들을 위해 땔감을 모으러 산에 갔다가 그 날 저녁 연탄가스 중독으로 사망한 스물두 살의 여대생이었다. 나는 그 나이에 무엇을 했지, 아무 생각 없이 살았던 자신이 부끄러웠다. 5.18의 마지막 수배자 《윤한봉》 평전을 읽었다. 오월 광주가 있기까지 이렇게 헌신적인 젊은이들이 있었다는 것을 알고 나는 놀랐다. 오월 광주는 그냥 온 게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들 젊은이들은 어느 날 갑자기 그 날의 현장으로 뛰어 들어 간 것이 아니었다. 그들은 늘 청년이 수행해야 할 역사적 소임을 고민해온 분들이었다. 1980년 5월 18일, 이은주란 젊은이가 영광이 아닌 광주에 살고 있었다면 무엇을 했을까? 생각을 해 보았으나 이은주는 결코 그들처럼 행동하지 못했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때까지 남을 위해 사는 삶을 한 번도 고민한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나는 지난 세월이 부끄러웠다. 나는 착한 교사였다고 할 수는 있으나 생각이 없는 교사였다. 2019년 5월 18일 나는 평생 처음으로 망월동 국립묘지에 참배했다. 비가 내렸다. 몸은 젖었으나 영혼은 오랜 어둠에서 풀려나고 있었다. 헤아려 보니 광주에서 보낸 세월이 40년이었고, 그 중 22년을 망월동에서 살았다. 이제 망월동은 슬프고 무서운 동네가 아니다. 자랑스러운 광주, 아름다운 망월동에서 산다는 것을 자신 있게 말하리라. 동고송 홈페이지에서 보기 :
https://dongosong.net/archives/6081 봄이 왔거만 봄은 오지 않았다. 유혜정(초등학교 교사) 1980년 5월, 나는 교육대학 1학년 봄을 지나고 있었다. 대학생이 되면 다들 한다는 미팅도 해보고, 책 두어 권 가슴에 안고 학교 이곳저곳 기웃거리다 친구들과 잔디밭에 앉아 이야기하며 다녔다. 유난히도 화사한 캠퍼스의 벚꽃 아래에서 친구들과 사진도 찍었다. 생소한 대학 교육과정에 적응하며 성실하게 대학생활을 이어갔지만 세상 물정엔 아무것도 모르는 풋내기였다.
나의 초등학교 생활은 국민교육헌장을 암기하는 것으로 시작되었다. “우리는 민족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 이 땅에 태어났다.”로 시작하여 “1968년 12월 대통령 박정희”로 끝나는 국민교육헌장을 외우며 초등학교를 다녔다. 영문도 모른 채 우리들은 ‘우리 대통령, 일 잘하는 대통령’ 하며 독재자를 찬양했다. 지금도 동네 골목에서 고무줄넘기하며 불렀던 노래가 입에서 나온다. 까닭도 모른 채 북한의 남침을 염려해야 했고, 10월 유신을 찬양하였다. 교실 환경정리를 할 땐 ‘총력안보’ 네 글자를 써서 걸어놓으라는 담임 선생님의 지시를 충실히 따랐다.
그땐 박정희가 독재자였던 지도 몰랐다. 그전 해 1979년 10월이 다 가는 어느 날 아침, 등굣길에서 들었던 박정희 대통령의 서거 뉴스는 충격이었다. 태어난 해부터 대통령이었던 분이 어느 날 갑자기 사라질 수 있다는 사실 자체가 나에겐 적응이 되지 않았다.
1980년 대학에 입학하여 듣게 된 “전두환 물러가라”라는 구호가 나에겐 무척 낯설었다. 그런 나도 5월 16일 광주의 모든 대학생들이 도청 앞으로 모인다는 소식을 듣고 도청으로 갔다. 뭘 알고 투철한 사명이 있어서 도청으로 갔던 게 아니었다. 그냥 물 흐르듯 따라간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그날 횃불을 들고 호랑이처럼 포효하던 박관현 열사의 모습을 기억한다. 그때 내가 본 열사는 대학생이라는데 중년의 아저씨 같은 인상이었다. ‘나와 같은 대학생인데 저 사람은 얼마나 똑똑하고 유식하면 저런 말을 할 수 있을까?’ 횃불 성회에서 듣고 있던 나는 잠깐 그런 생각을 했던 것 같다.
근래 그때의 영상을 찾아본 적이 있다. “꺼지지 않는 횃불과 같이 우리 민족의 열정을 온 누리에 밝히자.”는 박관현의 음성은 40년이 지난 오늘 다시 들어도 그때 그날처럼 가슴 절절하게 다가왔다. 열사가 죽지 않고 살아서 이 나라를 위해 일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원통하기 그지없다.
횃불 성회에 참가한 후로 광주에서 일어난 일들을 나는 보지 못했다. 시골에 계신 부모님이 나를 데리러 광주로 오셨기 때문이다. 부모님은 고흥 녹동에서 살고 계셨다. 나는 아무 생각 없이 부모님과 함께 고향으로 내려갔다.
대인동 시외버스 터미널, 지금은 흔적도 찾을 수 없는 곳이 되어 버렸다. 내가 본 단 하나의 5.18은 이 터미널에서 벌어졌다.
막 버스에 오르려는 순간이었다. 계엄군과 학생들 사이에서 쫓고 쫓기는 일이 번개처럼 벌어졌다. 학생들이 버스 밑으로 몸을 숨겼다. 버스 밑에 몸을 숨긴 학생을 계엄군은 기어이 끄집어냈다. 방망이로 때리면서 잡아끌고 갔다. 엄마는 치를 떨면서 나를 버스 위로 밀어 올렸다.
휴교령이 끝나고 학교에 돌아오니 여름이 와 있었다. 그 후 40년이 지난 오늘까지 어머님과 나는 그 일에 대해 말을 꺼내지 않았다. 무슨 연유인지 몰라도 나는 누구에게 그 해 5월의 일들을 이야기해본 적이 없다.
언젠가 동료 교사들에게 5.18 행방불명자 임옥환의 이야기를 한 적이 딱 한 번 있었다. 그 이야기를 들은 동료 김목 선생님은 다음과 같은 글을 써주었다.
광주는 지금도 비가 내리고 있다 김목
1980년 5월 18일 무등산에서 벗들과 술 마시는데 시내에서 계엄군이 학생들을, 젊은이들을 뭐라고? 아녀자들까지 몽둥이로 치고 대검으로 찌르고 머리통이 깨지고, 젖가슴이 찔리고
5월 19일부터 아침이면 2천원을 호주머니에 넣고 도청으로, 금남로로 갔다. 천원은 모금함에 넣고, 천원은 점심값이었다.
광주천 다리 건너엔 돼지고기를 석쇠에 구워주는 집이 있었다. 대여섯이 천 원씩 모아 안주 한 접시 소주 두세 병 점심으로 때우고 오른 손 번쩍번쩍 치켜들어 외쳤다. 구속인사 석방하라! 전두환은 물러나라! 이대로 당하고만 살 수가 없었다. 2008년 5월 문득 다시 그날을 떠올린다. 두 학생이 고흥을 향해 걸었다. 고향으로 내려가는 차편이 끊긴 탓이었다. 터벅터벅 길을 걸었다. 남광주를 지나, 학동을 지나, 소태동을 벗어나는데 갑자기 콩 볶듯 기관총 소리가 터졌다. 두 학생은 혼비백산 정신없이 뛰었다.
한참을 달리다가 문득 뒤돌아보니 친구가 보이지 않았다. 친구는 영영 돌아오지 않았다. 그리고 아무도 다시 볼 수 없었다. 당시 고등학교 2학년 임옥환이었다. 지금은 ‘5․18 행방불명자’라고 불린다. 임옥환! 남겨진 님의 이름은 영원하리니 고이 영면하시라.
내가 사는 곳은 지산동이다. 집 가까운 곳에 동산 초등학교가 있다. 지난해 전두환 씨가 이곳 광주 법원에 출두하던 날 창문으로 “전두환 물러가라!”고 외치던 아이들의 학교, 동산 초등학교 말이다. 나는 고개를 돌려 동산 초등학교를 바라본다. 40년 전의 그날처럼 봄은 왔지만 봄은 오지 않았다. 동고송 홈페이지에서 보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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