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회찬 그리고 문정은 후보와 같은 젊은이에게서.... 안병진 교수님의 <정동칼럼>을 잘 읽었습니다. 안 교수님의 글은 무디어져 가는 나의 감각을 떨게 하여, 답신을 쓰지 않고는 못 견디게 하였습니다. “그날 노회찬은 첫사랑에 빠진 소년처럼 들떠 있었다.”라는 문구 때문일 겁니다. 사람들은 그렇게 말하더군요. ‘노회찬은 좋은데, 정의당은 싫다.’고요. 너무나 어처구니가 없어 뭐라고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오늘의 정의당이 있기까지 노회찬과 그의 벗들이 흘린 땀의 크기를 아는 걸까요? 오늘의 정의당이 있기까지 노회찬과 그의 벗들은 공장에서 땀을 흘렸습니다. 더러는 용접기의 불꽃과 씨름하였고, 더러는 선반과 밀링의 손잡이를 잡았습니다. 묵묵히 일을 했습니다. 오늘의 정의당이 있기까지 노회찬과 그의 벗들은 거리에서 최루탄을 마시며 눈물을 흘렸습니다. 우리는 박종철 군의 고문치사 소식을 듣던 그 날, ‘살인 고문 정권을 타도하기 위한 투쟁위원회’를 결성했고, 부천역에서 남대문에서 시위를 주도했지요. 사람들은 ‘국민운동본부’가 6월 항쟁을 이끌어간 것으로 알지만, 거리에서 시장에서 공단에서 집회와 시위를 이끈 이들은 저희들처럼 이름 없는 일꾼들이었습니다. 오늘의 정의당이 있기까지 노회찬과 그의 벗들은 민중 후보를 앞세워 대통령 선거에 뛰어들었습니다. 교수님도 백기완 후보의 티비 연설에 감격했다고 하였는데, 그즈음 종로 대로에 걸린 프래카드를 기억하고 있을까요? “광주학살 원흉을 심판하라”, “노동삼권 보장하라” 12월 새벽은 몹시 추웠습니다. 나는 그 시각 종로의 전봇대에 올라 프래카드를 걸고 다녔습니다. 손발이 꽁꽁 얼었습니다. 우리는 1991년 ‘노동자 정당 추진위원회’를 결성하였습니다. 교수님도 그렇게 말했지요. “군사독재 치하의 엄혹한 시절, 그리고 한국에서 최초로 합법적인 노동자 정당 추진위원회가 출범했을 때 청주교도소에서 노회찬의 상기된 얼굴을 아직도 잊을 수가 없다.” 그랬습니다. 우리의 동지 노회찬은 1989년 12월 치안본부에 체포되었고, 체포를 모면한 우리들은 다시 모여 노회찬과 함께 추진하던 일을 계속 추진했습니다. 그 일은 어려웠고, 위험이 따르는 일이었습니다. 다름 아닌 노동자의 정당을 만드는 일이었습니다. 안 교수님이 목격한 노회찬, 그날 첫사랑에 빠진 소년처럼 들떠 있었던가요? 나는 요즈음 문정은이라는 청년의 국회진출을 위해 신명을 바치고 있습니다. 노회찬은 차세대 당 지도자를 육성하지 않으면 진보정당의 미래는 없다고 보았구요. 그래서 20대 젊은 청년을 당의 부대표로 발탁하는 획기적인 제도를 만들었습니다. 그렇게 하여 발탁된 젊은이가 문정은 후보입니다. 나는 ‘노회찬을 보낼 수 없다’며 한겨레신문에 글을 쓴 적이 있지요. “모두가 자유롭고 평등한 세상을 만들자고 뛰어든 진보정당 운동이었는데, 이렇게도 진보정당의 가는 길이 힘들다니 너무나 억울하고 분통합니다. 선장을 잃은 진보정당의 조각배는 이제 무엇에 의지하여 망망대해를 헤쳐가야 하나요?” 나는 문정은 후보와 같은 젊은이에게서 진보정당의 희망을 찾고 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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