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상원 일기』의 원고를 출판사에 넘겼습니다. 5월이면 『윤상원 일기』를 만날 것입니다. 윤상원의 고교 시절를 살짝 훔쳐 봅니다. 윤상원의 고등학교 시절(1966-1968) 일기 해제-3. 십자가 소년 상원은 또 입시를 치렀다. 1963년에는 광주서중학교 고사장에서 입시 시험을 치렀다. 1966년에는 광주고등학교 고사장에서 입시 시험을 치렀다.
“하늘이 무너지고 지구가 없어질망정 나는 결코 합격한다고 자부하고 싶다. 공부 박사님들, 경기고나 일고 갈 그들과 겨뤄 볼 자신이 있다.”(66.1.12)고 다짐했으나, 광고에서 시험을 치르고 난 뒤 “집에 와서 보니 틀린 것이 많았다. 오늘 몇 시간의 시험을 잘 보기 위해서 1년 동안 온 정력을 쌓아온 일을 생각하면 너무나 허망한 일이다.”(66.2.3)고 적었다. 낙방을 예감한 것이다. 10대의 소년이 또 패배를 맛보아야 했다. 졸업이란 두 글자는 가슴에 큰 미련을 남긴다. 청운의 꿈이 깨졌기 때문이다. 비록 전기(시험에)는 실패의 쓴맛을 보았지만, 입학식이 되고 보니 새 기운이 솟아난다. 나는 희망을 갖는다. 내 비록 이류 학교(살레시오 고)는 다닐망정 일류 학교에 지고 싶지 않다. 일류 학교의 학생들과 이류 학교 학생들의 사람의 차이란 있을 수 없다고 생각한다. 나는 절대 실망하지 않는다. 고등학교 생활의 첫발을 딛는 이 시간부터 참된 사람이 되고, 값있는 고교생활이 되도록 전력을 기울이겠다.(66.3.5) 지금의 살레시오 고의 위치는 광주 시내 한복판이지만, 그 시절 살레지오 고의 위치는 광주의 변두리였다. 왜냐하면 광주의 시가지는 도청을 중심으로 하여, 동쪽으로는 학동, 남쪽으로는 월산동, 서쪽으로는 임동, 북쪽으로는 계림동으로 이어지는 주택가로 구성되었다. 빈민촌 계림동 너머에 경양방죽이 자리하고 있었고, 그 너머엔 해발 100미터가 되지 않는 야트막한 태봉산이 있었으며, 태봉산 너머에 광활한 전남대학교 교정이 있었다. 살레시오 고등학교는 태봉산과 전남대 사이에 자리를 잡고 있었으니 영락없는 변두리였다. 소년 상원은 임동에서 자취를 하면서. 아침이면 일어나 책가방을 들고 들판을 걸어 학교에 갔다. “오늘도 학교에 갈 시간이 되었다. 내가 가는 학교 길은 너무나 쓸쓸하다. 동행하는 학생이 있으면 얘기라도 하겠는데 나 혼자 들판 길을 걸었다.”(66.4.18) 생각하는 소년이었다. “아이들은 점심시간에도 공부에 여념이 없지만 나는 밖에서 무엇인가 생각해보는 것이 좋다.” 무엇을 생각했을까? “나는 혼자 앉아서 1학년 동안에 무엇을 하는 것이 옳을까 생각하였다.” 공부일까? 그것은 아니었다. 소년은 공부에 대한 나름의 견해를 정립한다. “시험을 치르기 위한 공부가 아닌 바른 공부를 하고 싶다. 사람을 둥근 공에 비유한다면 공부는 공의 일부이다. 그 일부가 완전하다고 해서 사람이 완전하다고 할 수 없다.” 소년이 생각한, 완전한 사람에 이르는 길은 무엇이었던가? “앞으로 나의 할 일은 이 네 가지다. 공부도 하고 독서도 하고 운동도 하고 친구도 사귀고 모든 것을 다 해야 한다. 일그러진 공을 둥근 공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공의) 한 부분만이 아니라 (공의) 전 부분을 동시에 둥글게 만들어야 할 것이다.”(66.5.9) 소년의 자취는 녹록치 않았다. 자취 생활의 첫 번째 곤란은 취사에서 왔다. 전기밥솥이 없던 시절이었다. 석유곤로도 없었다. 연탄불로 밥을 지어야 했다. 그런데 “아침에 일어나 보니 연탄불이 꺼져 있었다. 다 쓴 공책 휴지 등을 모아 아침밥을 지었다. 이젠 연탄불을 피울 기력마저 없다.”(66.9.13) 한 번만이 아니었다. “연탄불이 또 꺼져버렸다. 어떻게 살릴 방법도 생각나지 않는다.”(66.11.7) 자취 생활의 두 번째 곤란은 찬거리에서 왔다. 14세 소년이 김치를 담글 순 없었다. 그래서 주말마다 고향집을 가는 자취생의 팔엔 빈 김칫독이 들려 있었다. “집에 오기는 수월해도 광주에 가기는 힘들다. 광주에서 올 때는 김치 독을 들고 시내의 한복판을 걸어야 한다. 오늘도 집에서 쌀과 김치를 가져가야만 했다.”(66.1.9) 김치마저 떨어진 날도 있었다. “반찬이 떨어져서 아침에는 콩나물을 사다 먹었다.”(66.10.6) 무엇보다 견디기 힘들었던 자취 생활의 세 번째 곤란은 쓸쓸함이었다. 가끔씩 자취방에 와서 살림을 돌보아주는 할머니가 임곡으로 가고 나면 소년은 덩그마니 혼자 남았다. “할머니께서 집에 가시고 보니 나 혼자 쓸쓸히 밥을 해먹는다.”(66.1.18) “오늘도 일과가 끝나고 저녁이 되었다. 밥상엔 큰 냄비가 덜렁 있을 뿐 아무것도 없다. 이것이 내 생활의 진실이다.”(66.10.7) “학교에서 돌아와 보니 컴컴한 방에는 자물쇠가 잠겨 있었다. 쓸쓸하고 허전한 마음은 가시질 않는다. 부엌에는 연탄불도 꺼져버렸다. 정말 절망적인 마음이다.”(66.10.17) 1966년 6월 21일 일기는 도스토예프스키의 <지하생활자의 수기>를 방불케 한다. 밤이면 빈대가 두렵다. 정말 무섭다. 눕기가 바쁘게 피를 인정사정없이 빨아 먹기 때문이다. 이것도 자취 덕분일 것이다. 사람은 고생도 해야 하고 빈대도 알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나는 절대로 자취 생활이 싫지 않다. 정말 해볼 만한 일이다. 앞방의 라디오에서 들리는 멜로디가 나의 벗이 되어 준다. 이제 잠자리에 들어도 되겠지! 모기도 굶주림의 소리가 들린다. 별 수 있나. 내 피를 빤다면 빨리지…….
일그러진 공을 둥근 공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공의 전 부분을 동시에 둥글게 만들어야 한다는 다짐 그대로 소년은 공부도 하고 독서도 하고 운동도 하고 친구도 사귀었다. 소년 윤상원은 체력 단련을 위해 태권도를 연마하기 시작했다. “4교시가 끝나고 강당으로 갔다. 태권도를 배우기 위해서다. 나는 태권도가 무슨 운동인지도 알지 못했다. 그러나 태권도의 정의와 목적을 알았을 때 배우고 싶은 의욕이 났다. 태권도는 정신수양을 비롯하여 신체 단련과 자기방어를 목적으로 한다. 나는 정신수양이란 점에서 내가 꼭 배워야 하겠다는 결심을 세웠다.”(66.3.26) 소년은 틈나는 대로 도서관에서 책을 대출하여 책을 읽었다. “학교 도서관에서 막사이사이 전기를 빌렸다. 나는 전기를 통해 막사이사이의 일생을 한눈으로 볼 수 있게 되었다.”(66.6.1) 처칠 回顧錄도 읽고, 人生이란 무엇이냐도 읽었다. “김형석 교수님의 책은 나에게 커다란 교훈을 주었다. 나는 앞으로 나의 갈 길이 정해지면 나의 신념에 의해서 살아갈 것을 맹세한다.”(66.6.7) 윤상원의 고교생활에서 가장 인상적인 것은 그의 종교 생활이다. 살레시오 고교가 가톨릭 학교인 탓도 있었겠으나 상원의 성당 출입은 좀 달랐다. 여느 학생과 달리 사뭇 진지하였다. “일찍 아침을 먹고 북동교회로 갔다. 벌써 미사를 보러오는 사람들로 교회가 가득 차 있었다. 엄숙한 분위기 속에서 나는 조용히 무릎을 꿇었다. 처음이라 모든 것이 서툴고 어색했다. 나는 앞으로 꾸준히 성서를 연구해 보려고 생각한다.”(66.4.24) 아마도 사춘기 윤상원에게 가장 큰 영향을 끼친 것은 가톨릭 교리였던 것 같다. “아침 성당엘 갔다. 기쁜 마음으로 천주님께 감사를 드리며 진정한 마음으로 종교에 대한 문제를 깊이 생각하려 한다.(66.9.4) 상원은 순박하였다. 일기에 적은 그대로 종교 문제에 파고들었다. 상원은 신부님께 물었다. “주님을 잘 섬기고 참다운 신앙생활을 하면 죽어서 영생을 얻을 수 있다고 한다면, 사람들이 중병에 걸려 살려고 병원까지 가서 야단법석 피울 것이 아니라 죽으면 되는 것 아닌가요?”(66.9.25) 가톨릭 교리의 치명적 약점을 소년이 건드려 버린 것이다. “천주님께서 주신 귀한 생명을 함부로 버리는 것은 천주님께 대한 모독이다. 천주님께서 부르실 때까지 자기의 육신을 잘 보전할 의무가 있다.”고 말했다고 한다. 소년의 눈이 매섭다. 가톨릭의 행사로서 피정을 갖게 되었고, 법관, 교육가 등 각 방면의 인사가 강연을 하였나 보다. “신앙을 가짐으로써 범죄를 방지할 수 있다. 그리스도교의 핵심은 사랑이다. 따라서 사랑으로 생활한다면 범죄는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천주님의 사랑은 어머니의 사랑보다 크다.”고 어떤 법관은 말하였다. 소년 윤상원은 천주님의 사랑이 왜 어머니의 사랑보다 큰가 알 수 없었다면서 무엇인가 큰 아쉬움을 느꼈다고 적었다. 역시 솔직한 소년이었다. 또, 어떤 분은 이렇게 말했다. “케네디나 장면 박사가 필시 무엇을 얻었거나 크게 느꼈기 때문에 천주교를 믿었을 것이다. 그러니 우리도 믿으면 무엇인가 천주님의 은혜를 얻지 않겠느냐.”
역시 소년은 연사의 구복 신앙에 동의할 수 없었다. “천주님을 이해하지 못하고 그리스도교의 핵심을 몰랐다는 것을 느꼈다. 무조건 믿는 식의 신앙보다 올바른 신앙을 가져야겠다는 것을 알았다.”(66.10.1) 대단한 직관이다. 신부님은 강론하였다. “인간은 천주님의 목적 달성의 도구로써 사용되고 있으며, 맡은 바 임무가 각각 다르고 주님의 섭리에 의해서 주님의 계획에 종사한다고 하셨다.”(66.10.2) 인간의 존재 의의는 하나님 나라의 실현을 위한 도구로 이용되는 데 있다는 가톨릭 교리의 핵심에 소년은 이르렀다. 이제 소년 윤상원은 친구 일영이를 만나 본격적인 종교 논쟁을 벌인다. 신은 존재하느냐? “일영이는 사후 영생은 있을 수 없다고 부인했다. 종교는 인간이 생활수단으로서 필요에 따라 만든 것이다.”고 말했다. 대단한 무신론이다. 상원은 친구의 무신론을 반박하며 유신론을 옹호하였다. “종교는 생활수단이 될 수 없는 것이다. 신을 어떻게 필요에 따라 인간의 생활수단으로 할 수 있을까? 신앙을 가지는 자만이 종교를 생각할 수 있을 것이며 신의 계시를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66.10.11) 고교 2학년이 된 상원은 고해성사를 하게 된다. 1월 27일 북동성당 회장님을 만나 고해성사에 관한 말씀을 들었다. “연약한 인간이 세속의 마귀에 휩쓸려 천당으로 가는 길을 잃기 때문에 사소한 죄라도 신부님께 가서 죄의 사함을 받아야 한다는 말씀이었다.”(67.1.27) 원죄설을 퍼뜨리고, 인간에게 죄의식을 고취하는 것이야말로 기독교가 범한 가장 큰 죄악이 아닐까? 소년 상원은 여학생들과 모여 술을 마시며 캠프파이어를 즐긴 것만으로도 죄의식에 사로잡혀야 했다. 한 해를 마감하면서도 죄의식에 사로잡혔다. “지금 내 인생은 타락했다. 본능적으로 타락해버린 것일까?”(67.12.31) 종교가 인간을 지배하는 시스템 중에서 가장 교활한 장치가 고해성사일 것이다. 너, 죄인이지? 털어놓아. 소년 상원도 고해성사의 덫에 걸렸다. “나의 마음은 거룩하신 神 앞에 떳떳하지 못하다. 몇 번이나 고해성사를 보려 했지만 마음이 좋지 못한 탓인지 또 다음으로 미루고 말았다. 왜 이리 인간은 불안전한 존재인가. 주여! 어찌하여 인간은 이렇게 불완전합니까? 정말 괴롭다. 내 죄를 안 이상 거룩하신 주님께 용서를 빌 뿐이다.”(67.2,9) 1980년 5월 26일 시민군 대변인 윤상원은 기자 회견에서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최후의 일인까지 투쟁할 것입니다. 우리는 결코 패배하지 않을 겁니다. 오늘은 비록 진다 해도 영원히 패배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역사의 십자가를 지기로 자처한 윤상원, 그의 영혼은 고교 시절 만난 가톨릭에 의해 단련된 것은 아닐까? 하나님은 인간에게 제각기 지고 갈만한 십자가를 주셨다. 내가 지고 갈 십자가도 지고 갈만하도록 지워 주셨을 것이다. 버리고 가는 건 인간의 자유다. 아! 나는 내 십자가를 버리지 않았느냐? 내가 지고 갈 내 십자가를 내가 버리면 아무 누구도 대신 지고 가지 못할 게다. 나는 꼭 지고 가야 한다. 한 걸음 한 걸음 지고 걷자. 그래 하나님께서 주신 내 의무를 다 마치자.(6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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