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광우 작가의 광주의 의인들 (8)서암 양진여 아들 ‘상기’와 함께 구국의 대열 참여 중흥동 태생 의병장…아들과 함께 교수형 주막 세워 군자금 조달 日軍 동태 정보제공 대치전투서 일본 광주수비대에 타격 가해 나는 매일 버스를 탄다. 일곡동에서 버스를 타고 산수동에 소재한 ‘오월의 숲’에 가는 것이 반복되는 나의 하루 여정이다. 서일초등학교 앞 정거장에서 15번 버스를 타면, 차는 설죽로를 따라 가다가 말바우 시장 앞에서 서암로를 따라 간다. 광주 사람들은 광주의 것을 우습게 여기는 특성이 있는데, 나도 그렇다. 설죽로와 서암로의 주인이 누구인지 나는 몰랐다. 캐묻고자 하지 않았다고 표현해야 옳을 것이다. 서암로의 서암은 한말 의병장 양진여의 호이고, 설죽로의 설죽은 한말 의병장 양상기의 호이다. 두 분은 1910년 대구 교도소에서 교수형을 당한 광주의 의병장이다. 성(性)이 같다. 맞다. 아버지와 아들이었다. 연구자에 의하면 부자가 함께 의병운동에 뛰어든 경우는 더러 있으나, 부자가 함께 교수형을 당한 경우는 드문 경우라고 한다. 나라를 지키는 정의로운 싸움에 부자는 목숨을 내놓았다. 그런데 우리는 이분들의 이름도 모른다. 이게 의향 광주의 얼굴이다. 양진여는 1862년 5월 11일 중흥동에서 태어났다. 진여의 부친은 집에 독선생을 모셔놓고 진여에게 글을 가르쳤다. 과거를 보고 싶다는 아들의 뜻을 아버지 양남중은 반대하였다. “일생을 책과 가까이 하면서 바르고 진실되게 살도록 하라.” 진여는 담양 삼인산에 초옥을 짓고 밤이면 병서를 읽고, 낮에는 무예를 익혔다. 그에게 학문과 무예를 배우려는 젊은이들이 찾아왔다. 진여의 나이도 40이 되었다. 1904년 진여는 담양군 대전면 갑향골에 주막을 차렸다. 광주를 비롯해 장성과 담양 등 무려 10곳에 주막을 차렸다. 주막은 의병을 일으키기 위한 군자금 조달처였고, 일본군의 동태를 파악하기 위한 정보 제공처였다. 1907년 4월, 담양 삼인산 아래 주막집에 손님이 들어섰다. 기삼연과 고광순이었다. 수인사를 나누고 막걸리가 한 순배 돌아간 다음, 기삼연이 먼저 입을 떼었다. “우리는 서암(瑞菴:양진여의 호)이 때를 기다려 왔다고 들었소이다.” 진여는 답했다. “구국의 대열에 나서겠습니다.” 모두 그의 손을 잡았다. 이튿날 새벽 진여는 격문을 써내려가기 시작했다. “내 일찍이 이 겨레의 피를 받고 이 나라의 곡식을 먹고 자랐으니 이 육신을 이 땅에 돌리려 함에 무슨 아쉬움이 있겠는가? 내 바라는 한 뜻은 왜적무리가 이 땅에 침노하여 생긴 잡초의 악독을 제거하려 함에 있다. 생사를 함께 하며 의혈을 맺을 동지를 구하노라.” 제자들은 격문을 돌돌 말아 붓대롱에 넣은 다음 각지로 흩어졌다. 달포 후 300여 명이 모여들었다. 양진여는 아들 양상기에게 무기 구입에 쓸 자금을 주었다. 그리고 왜경이 되라고 명하였다. 8척 거구의 양상기는 광주경찰서 순사가 되었다. 그는 왜경의 기밀을 탐지해 아버지에게 연락해 주었고, 무기를 구입해 몰래 보냈다. 1908년 2월 김태원 의병장의 통문이 왔다. 무등산 무동촌에서 적을 섬멸할 계획이니 지원병을 보내달라는 것이었다. 2월 3일 좌익장 김처중은 이렇게 보고했다. “적은 12명의 인원을 이끌고 무동촌 골짜기로 들어 왔습니다. 맨 앞에는 기골이 장대한 왜장 한 명이 말을 타고 사방을 두리번거렸습니다. 집중 사격을 가했습니다. 총 세 발을 맞고도 죽지 않고 대도를 휘두르며 끝까지 저항하여 돌로 쳐서 죽였습니다.” 1908년 11월 양진여는 광주수비대를 유인해 섬멸할 계획을 세우고, 각 의병진에 원병을 청했다. 31세의 청년 대장 전해산이 200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군막으로 왔다. 900여 명의 의병이 병풍산에서 야간 훈련에 들어갔다. 전해산은 마을 앞 개울둑 아래 매복했다. 양진여는 마을 야산에 매복했다. 새벽 공기를 찢는 총성이 터졌다. 싸움은 해가 기울고 나서야 멎었다. 1월 23일 시작된 대치 접전은 무려 12일 동안이나 계속되었다. 한재 마을은 쑥밭이 되었다. 연합 의병군이 광주 수비대에 타격을 준 가장 큰 전투였다. 전승을 자축할 한 잔 술도 나누지 못한 채 의병장들은 각자 자기의 군사를 데리고 흩어졌다. 1909년 8월 일제는 2260명의 대병력을 호남에 투입, 소위 ‘남한대토벌작전’을 시작했다. 그 무렵 양진여는 담양 갑향골 주막에 홀로 누워 있었다. 3년에 걸친 전투 생활로 몸은 극도로 쇠약해졌다. 8월 25일 오후, 뙤약볕이 내리쬐는 주막 앞마당에 군홧소리가 요란해졌다. 가지무라 중위가 이끄는 40명의 정찰대가 들이닥쳤다. 양진여는 눈을 감았다. 손과 몸이 결박되었다. 1910년 5월 30일 양진여는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48세였다. 의병장 양상기는 27세 나이에 아버지가 순국한 지 두 달 뒤 같은 장소인 대구형무소에서 사형을 당했다. 광주시는 서암(瑞菴) 양진여(梁振汝)를 기리기 위해 동운 고가도로부터 서방사거리까지를 ‘서암로’라 명명하였고, 설죽(雪竹) 양상기를 기리기 위해 북구 일곡동에서 신안 제1교까지를 ‘설죽로’라 명명하였다. /(사) 인문연구원 동고송 상임이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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