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 그것은 나에게 무엇인가? 지난 2006년 <철학콘서트>를 발간했고, 2009년 전남대 철학과 석사과정에 입학을 했다. 2011년엔 교사들과 함께 고전공부모임을 꾸렸다. 100여 명이 넘는 분들이 이 공부모임을 거쳐 갔다. 지금도 20여 명과 만나고 있다. 2006년을 기준으로 하면 13년의 세월 동안 나는 인문과 함께 살아온 셈이다. 인문을 매개로 벗을 만났고, 벗들과 인문을 공유하면서, 하루하루를 보냈다. 장년의 13년을 나는 송두리째 인문의 제단에 헌납한 것이다. 대체 나에게 인문은 무엇인가? 중고등학교에서 가끔 인문 강연을 요청한다. 그때마다 나에게 프로필을 요구한다. 나는 10대부터 감옥에 갔고, 20대엔 공장에 갔다. 노동운동을 하면서 정치투쟁의 선두에 섰고, 30대엔 사회주의 조직을 만들었으며, 40대엔 민주노동당을 만들었다. 따라서 사람들이 나의 전력에서 투사의 거친 이미지를 읽는 것은 당연하다. 하지만 고백하건대, 나는 그 어느 한 순간에도 고전을 손에서 놓은 적이 없다. 공장에서 일하던 때도, 지하를 암약할 때에도, 마침내 지상으로 나와 합법적 활동을 할 때에도 나는 삶의 근본 문제에 대한 고민을 포기한 적이 없었다. ‘나는 무엇을 위해 살 것인가?’ ‘죽음은 나에게 무엇인가?’, ‘우리가 만들어야 할 이상 사회는 무엇인가?’ 늘 자문하였다. 돌이켜 보면 나는 투사이기 이전에 한 명의 인문 학도였다. 나는 독재정권을 무너뜨리고 이후 어떤 사회를 만들 것인가, 고민하였다. 1984년 출간한 <소외된 삶의 뿌리를 찾아서>는 이 물음에 대한 답이었다. 소외를 극복한 사회, 그것이 내가 설정한 한국 사회의 미래상이었다. 온종일 식당에서 접시를 닦는 아주머니들의 파리한 얼굴에서 나는 소외의 현장을 몸으로 느꼈다. 현실에 대한 비판의 근저엔 늘 인문 정신이 도사리고 있었다. 미래가 보이지 않으면 과거를 찾는다. 아니 미래의 전망을 찾고 싶을 때, 우리는 과거에게 묻는다. 더 이상 길을 말해주는 선생이 없을 때, 우리는 무덤에 누운 현자를 찾는다. 광주항쟁을 겪고, 어두운 죽음의 시대를 통과하던 시절 나는 이 어둠의 터널을 빠져나가기 위한 지혜를 얻고자 역사를 찾았다. 공장을 다니면서도 나는 청계천 고서적을 뒤졌다. 1985년 2월 <들어라 역사의 외침을> 이렇게 집필하였다. 노동운동을 하면서, 나의 모든 관심과 열정은 노동해방의 대의를 퍼뜨리는 일에 집중되었다. 마르크스의 학습을 조직하였다. 하지만, 회의를 마치면 우리는 공자와 석가, 노자와 예수를 논하였다. 우리에게 마르크스는 괜찮은 사상가의 한 명이었다. 이런 인문적 성찰에서 나는 1991년 <뗏목을 이고 가는 사람들>을 집필하였다. 소련공산당이 몰락하였다. 우리가 추구했던 사회주의 이념은 재정립되지 않으면 안 되었다. 마르크스시즘, 어디까지 유효하고, 어디부터 버려야 할 것인가? 이 물음을 풀기 위해, 나는 플라톤을 찾았다. 소크라테스를 만났고 호메로스를 읽었다. <논어>를 다시 읽었고, <도덕경>을 다시 읽었다. 세계를 보는 나의 눈은 좀 더 관대해졌다. 이렇게 하여 2006년 나는 <철학콘서트>를 집필했다. “인문은 나에게 무엇인가?” 그러니까 내가 투옥되고, 수배되고, 지하 생활을 하면서, 투사의 삶을 살았지만, 알고 보면 나의 삶을 이끌어준 정신의 힘은 온전히 ‘인문’에서 나왔다. 인문은 삶의 근본 문제에 대한 탐색을 도와주었고, 시대의 가장 아픈 곳을 감지할 수 있는 촉수를 주었다. 뿐만이 아니다. 인문은 투쟁의 교과서에 나오지 않는, 또다른 미래를 보여주었다. 인문은 이념보다 더 깊은 것이었고, 인문은 이념보다 더 민감한 것이었으며, 인문은 이념보다 더 원대한 것이었다. 나에게 인문은 철학과 종교였고, 시와 예술이었으며, 혁명 강령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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