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하나의 시민군 유용상 (광주광역시 수완미래아동병원 원장 / 5·18 당시 전남대학교 병원 인턴) 1979년 10월 27일 지금의 전남대학교 의과대학 학생회관 자리에 있던 ‘명학당’에서 본과 4년의 마지막 공부를 하던 중 달려오는 한 학우의 외침으로 역사는 새로운 전환점을 맞고 있었다. “박정희가 죽었다.” 정치와는 담쌓고 지내는 의대 생활이었지만 몇몇의 선후배들이 모처에 불려가 이상하게 변해오기도 하였고, 중앙정보부나 경찰, 형사의 끄나풀들이 정체모를 공포의 대상으로 주위를 맴돌던 시절이었다. 대통령의 사망 소식에 나라의 위기의식보다 파아란 희망이 우리들 마음속에 피어올랐던 아이러니컬한 역사의 순간이었다. 12·12사태의 진상을 전혀 파악하지 못한 채 계엄사령부 합동수사본부장 전두환의 모습만이 이상하게 뇌리를 자극하는 가운데 1980년 봄을 맞이하였다. 고광일, 안명섭, 신동철, 유재광, 김재규, 윤진상, 양건호 등 K.P(Kim’s Plan의 약자로 군전문의 요원으로 수련 받는 전공의)와 김의형, 조백현 등 N.K(Non Kim의 약자로 병역 의무를 필한 전공의) 선배들로 구성된 우리들은 80년 전남대병원의 인턴진이었고 병원 진료의 주요 지원자였다. 그때만 해도 레지던트 지원자의 윤곽이 대개 정해져 있어 힘들지만 상당히 낭만적인 인턴 생활이었고, 개나리 동산 바로 밑 인턴 숙소는 우리의 쉼터였다. 숙소 바로 옆 영안실도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로 작았고, 아마 그때는 영안실에서 장례를 치르는 풍습이 생겨나기 전이었던 것 같다. 5월 중순 어느 날 의과대학 검시실과 ‘명학당’ 앞을 2인 1조로 곤봉을 들고 지나가던 공수부대의 규칙적인 군홧발 소리는 왜 그렇게 섬뜩하였는지. 어느 후배는 팔이 부러지고, 학생들은 의사처럼 가운으로 위장하고, 모교수의 대학 다니는 딸은 가짜로 입원했다. 광주의 하늘은 봄인데도 불구하고 냉랭한 살기와 폭발직전의 침묵 바로 그것이었다. 목마르게 기다렸던 민주화의 열망으로 시작된 도청 앞 평화적 시위가 공수부대의 무자비한 폭력사태로 이어지자 부도덕한 군부에 맨몸으로 저항하게 되었다. 19일 오후쯤 한 학생이 첫 총상으로 응급실로 들어왔다. 이후 우리들은 병원의 최일선에서 혈관확보로 시작된 수술 준비로 정신없이 뛰어다녔다. M16 탄환에 팔이 없어져버린 어린 환자, 담양 방면 검문소에서 통과시켜 주질 않아 뒤돌아서는 일가족에게 집중사격으로 척추가 마비된 어린 래향이, 침상이 부족하여 복도에까지, 지금의 병원 로비까지 총상 환자로 가득 차고, DOA(도착 시 사망, Death on Arrival) 환자의 손에는 카빈소총의 탄창과 구릿빛 탄환이 그리도 단단히 쥐어져 있었다. 다행히 헌혈자가 넘쳐서 혈액은 부족하지가 않았다. 부상자들을 실어 나르는 적십자 표시 휘장을 한 지프차의 민간위생병은 그렇게 용감하게 보일 수가 없었다. 수술장 옆 신장 투석실 바닥에 매트리스만 깔고 수술 후 새우잠을 자다가 총소리와 병원복도에 터트린 최루탄에 놀라 도망치기도 하였다. 수술 도중 수술실 창문으로 들어오는 총탄에 놀라 고개를 움츠렸다가도 금세 계속 수술에 열중하시는 교수님과 수술 팀의 기억도 눈에 선하다. 수술실로 날아온 탄환 바람을 쐬러 잠깐 병원 옥상에 올랐을 때 발포위협을 하던 헬리콥터 날개의 타타타타 소리는 공포 그 자체였다. 검은 연기 피어오르는 시내 쪽 공기에서 느껴지는 것은 차디찬 살기뿐이었다. 영화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의 남북전쟁 장면처럼 세무서가 불타는 저녁 응급실로 걸려온 어느 병원 원장님의 딸과 아내를 찾는다는 울먹이는 전화 목소리는 아직도 귀에 생생하다. 총알이 무서워 지그재그로 인턴숙소로 달려 들어가 잠을 청하다가, 숙소 바로 위 개나리 동산에 포진한 시민군의 새벽녘 전투와 응사 사격소리에 놀라 캐비넷 안으로 몸을 감추던 동료들의 극한적 공포감도 눈에 선하다. 자기들이 키워놓은 사태에 겁을 먹은 공수부대는 저녁이 되자 도로 양 옆으로 총을 난사하며 화순 방면으로 퇴각할 때 남긴 전남대 병원 건물 벽의 무수한 탄흔은 정치군인의 마각의 증거로 우리의 뇌리에 박혀 영원히 지워지지 않는다. 공수부대를 격퇴한 다음 날, 날이 새니 헌혈자들은 줄을 이었고, 잃어버린 가족을 찾는 가족들의 행렬은 영안실에 줄을 이었다. 죽은 자식을 찾아낸 어머니들의 처절한 오열, 암매장 며칠 후 발굴된 시신들의 악취와 퉁퉁 부은 음낭, 무책임한 방송과 신문의 폭도 운운, 선무공작에 우리는 하늘을 쳐다보며 가슴을 에는 아픔으로 눈물을 훔쳤다. 탈출로를 묻는 프랑스 기자의 등에 꽂힌 신문사 깃발을 보고 제발 이 사실을 외부에 알려 달라고 빌고 빌었고, 화순 방면으로 간다던 그에게 한 시민군은 목숨을 건 안내를 자청하였다. 새벽의 여명이 오기 직전 차르르 차르르 하는 탱크 소리와 함께 며칠간의 광주 시민의 질서정연한 사태 해결 노력은 수포로 돌아간 채 희생자를 남기고 끝이 났다. 80년 5월 전남대 병원은 수많은 살상을 직접 보았다. 나를 포함한 우리 의사들은 단순한 치료자였을까? 단연코 아니다. 살상의 산증인이다. 우리는 80년 광주 의거의 대학병원 현장에서의 한 증인이다. 나를 포함한 우리 의사들이 단순한 치료사였을까 하는 의문에 나는 단연코 아니라고 대답한다. 저항의 최전선에서 총을 잡지는 않았어도, 팔에 총상을 입은 채 다시 싸우러 나가려 하는 시민군을 만류하는가 하면, 가슴이 뻥 뚫린 흉부외과 입원 시민군의 환부 드레싱에 우리는 최선을 다하였다. 병원의 가운은 학생들과 젊은 시민을 숨겨주는 유일한 도구였으며, 우리는 그야말로 또 한쪽의 시민군이었다. 우리는 “그때 광주사람 너무 했어.”라는 다른 지역 사람들의 말에 수년간을 얼굴 붉혀가며 함께 싸워 왔다. 역사의 수레바퀴는 헛돌다가도 다시 전진할 것이다. 지금은 헛돌고 있지만 잘못된 정권과 부당한 폭력에 대한 우리 광주 시민의 저항 정신은 우리 전 국민의 민주의식에 크나큰 자긍심으로 심어져, 동학과 의병운동 그리고 독립운동으로 이어지는 민족사의 횃불로 길이 남을 것이다. 이 글은 1985년 즈음에 썼고 광주광역시 의사회에서 1996년 발간한 『5·18의료활동Ⅰ』에 수록했던 글을 발췌해 다듬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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