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임경석 교수 역사 특강
11월 3일(목) 광주학생독립운동기념 역사관에서 「잊힌 사건을 찾아서, 잊힌 인물을 찾아서」라는 주제로 성균관대 임경석 교수의 역사 특강이 개최되었다. 임 교수는 역사학자로서 일제 강점기 사회주의운동사 연구에 뚜렷한 학문적 성과를 거둔 분이다. 특히, 한평생 독립운동에 헌신했으나 알려지지 않은 사람들에 주목하고 오랜 시간 그들이 독립운동의 공식적 역사서에 배제되어왔음을 지적해 왔다. 이와 관련해 지난 9월 《독립운동 열전 1,2》 이라는 책을 출간하였다. 이 책은 독립과 해방을 위해 온힘을 기울인 인물들, 개인의 일신을 위해 그들을 배신했던 이름들, 이들을 둘러싸고 벌어진 갖가지 사건들을 옴니버스 형식으로 구성하여 독자들이 새로운 시각으로 역사를 바라볼 수 있도록 구성하였다. 이날 특강 시간에도 임 교수는 「15만원 사건의 진실」이라는 주제로 간도에서 있었던 독립운동의 역사적 팩트를 드라마처럼 전달함으로써 60여명의 청중들이 강연이 끝날 때까지 한 명의 이석도 없이 몰입하는 즐거움을 갖게 하였다.
* 임경석교수는 '한겨레21'에 '임격석의 역사극장'을 연재중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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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노성태 이사 학술대회 발표
2022년 11월 11일(금) 13:00~17:00 광주광역시 교육연수원 시청각실에서 ‘광주학생독립운동 발상지의 역사적 문화재적 가치’라는 주제로 동고송 노성태 이사가 학술발표를 하였다. 노성태 이사는 이 발표에서 특히 ‘광주고등보통학교 학생들의 광주학생독립운동 참여’라는 의제로 남도 정신과 의향 정신 등을 심도 있게 발표하였다. 이날 학술발표에 참여한 동고송 회원 및 광주 지역 역사교사들의 큰 호응을 얻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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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남도역사기행 ‘나주’
제9차 남도역사기행(나주)이 11.19.(토) 늦가을의 청명한 날씨 속에 진행되었다. 해설과 진행을 맡은 노성태 동고송 이사는 오랜 기간 나주학회의 일원으로 활동한 데다 나주가 고향인 분이어서 나주와 관련된 공식적인 역사기록 이면의 이야기까지 재밌고 섬세하게 전해 주었다. 이번 역사기행은 광주 국립박물관 주차장에서 출발하여 나주 반남의 고분군과 나주국립박물관의 대형 옹관, 복암리 고분전시관을 방문하여 마한의 유적과 유물 관람을 하면서 삼국시대 이전의 고대사를 다시 살펴보게 되었다. 점심 후에는 나주 금성관과 나주 목사의 근무처였던 나주목 내아 건물을 살피고 끝으로 나주향교를 들러 광주로 돌아왔다. 왕건과 오씨 부인 이야기, 정약용·정약전 형제의 가슴 아픈 이별 등을 화제로 답사 중간에 삼삼오오 서로의 생각들을 나누는 시간들이 역사기행의 즐거움과 의미를 깊게 만들었다.
(답사 일정 : 반남의 마한고분군-나주국립박물관-복암리고분전시관-나주 금성관 객사 및 나주목 내아-나주향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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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독립유공자 서훈 신청
<장재성기념사업회>에서는 3년 여에 걸쳐 독립운동가 서훈 신청 운동을 꾸준히 펼쳐오고 있다. 그동안 보훈처에 132명에 대한 서훈을 신청하여 해마다 몇 분씩 명예회복과 서훈 결과를 마련하였다. 올 초 3·1절 기념에는 송홍 선생이 이번 달 11월에는 이옥 독립운동가가 ‘순국선열의 날’을 맞아 대통령 표창을 받았다. 정해두 선생의 서훈 신청 역시 계속 노력하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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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저는 독립운동가 정해두 선생의 딸 정현숙(48****-2******)입니다.
- 그동안 국가보훈처는 친일 흠결의 사유로 정해두 선생의 서훈을 거부한 것으로 압니다.
- 저희 유족이 알고 있는 바, 정해두 선생이 조선인들의 업무 처리를 위해 일본어 통역을 도와준 일은 있으나 면 서기로 복무한 적은 없습니다.
- 2022년 4월 진화위(진실과 화해를 위한 과거사 위원회)에 정해두 선생의 행적에 관한 조사를 위임하였습니다.
- 2022년 11월 1일 진화위로부터 아래와 같은 결정통지서(첨부-1)가 왔습니다.
- 이에 정해두 선생의 서훈을 요청합니다.
2022년 11월 29일
정현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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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광우의 산책>>
1929년 11월 3일 광주의 대시위를 이끈 학생독립운동의 주역이 장재성 선생이라면, 광주의 시위를 전국으로 확산시킨 장본인은 장석천 선생이다. 선생은 완도 출신인데, 서울의 중앙고보를 다니던 중 일본인 교사의 조선인 차별에 항의하여 싸운 것으로 퇴학을 당했다. 1926년 이곳 광주로 내려와 당시 독립운동을 이끌었고, 광주고보의 비밀결사 성진회를 이끌기도 하였다. 선생은 1930년에 한 차례 옥고를 치렀고, 1932년 또다시 옥고를 치렀는데 이때 일경에게 당한 고문으로 몸이 망가졌다. 1933년 병보석으로 출옥하였으나 1935년 숨을 거두었다. 장석천 선생이 마지막 숨은 거둔 집이 광주일고 교문에서 100미터 떨어진 곳에 있었다. <장재성기념사업회>에서는 광주북구청에 이 사실을 호소하였고, 지난 11월 18일 북구청 공무원들과 함께 표지판을 어느 곳에 설치할 것인지 협의를 하였다. 머지않아 장석천 선생의 표지판이 설치될 것 같다. 장석천 선생이 작성한 격문은 지금 읽어도 피를 끓게 한다.
“조선학생이여, 궐기하라. 투쟁으로써 광주를 지지하라. 반항과 유혈이 있는 곳에 결정적 슬 승리가 있다. 궐기하라. 이후의 역사는 우리의 것이 아니냐?”
(1929년 12월 장석천이 서울에 뿌린 격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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