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월 황광우의 산책》 마흔 번의 이사
이번이 마지막이길 바라면서 또 이사를 했다. 지난 4월 <사단법인 인문연구원 동고송>이 산수동에서 두암동으로 이사를 했다. 내가 광주에서만 치른 이사가 무려 스무 번이 넘는다. 서울과 인천에서 치른 이사를 다 합하면 내가 치른 이사는 도합 마흔 번이 넘는다. 이사는 나의 운명이었나?
왜 그리 떠돌아야만 했을까? 어려선 가난해서 떠돌았다. 산수동 기찻길 옆 오막살이에서 태어나 고등학교 때 퇴학을 당하고 서울 종로학원에 다니기 위해 광주를 떠났던 1975년까지 이사는 우리 집의 연중행사였다.
결혼하고서도 이사는 나의 관례였다. 신림동에서 신혼집을 차리기도 무섭게 하염없이 떠돌아다녔다. 왜 그리 떠돌아야만 했을까? 어려서는 가난해서 이사를 다녔지만 커서까지 떠돌아다닌 것은 돌이켜 보면 내 마음씨가 모질지 못한 탓 때문이었다.
지하활동이 어려운 것은 모일 수 있는 합법적 공간이 없기 때문이다. 산속에서 회의하는 것도 한두 번이지, 누군가가 다음 회의 장소를 만들어내야 한다.
“다음 모임은 어디에서 할까요?”
모두가 침묵한다. 음식점에서 성질 급한 사람이 먼저 밥값을 치르듯, 마음씨가 모질지 못한 사람이 다음 모임 장소를 제안한다.
“나의 방에서 모이죠.”
회합이 반복되다 보면 누군가에게 미행이 붙는다. 어느 날부터 나의 집 앞에 검은색의 자동차가 서 있다. 잠복이다. 서둘러야 한다.
“여보, 짐을 싸세요,”
“이불이며 장롱은 어찌하구요?”
“그냥 버리고 떠나야 합니다.”
“어린아이를 안고 어디로 가냐구요?”
“그냥 따라오세요.”
방랑자를 맞이해주는 고마운 친구들이 있어서 나의 떠돌이가 가능하였다. 버리고 떠난 집의 가재도구를 챙겨준 형이 있어서 떠돌 수 있었다. 황지우의 <인천으로 가는 젊은 성자들>은 이런 슬픔 속에서 태어난 시이다.
전철은 사람을 싣고 서울로 오지만
빈 전철은 사상을 싣고 인천으로 간다
盲人 父子가
내 主를 가까이
를 부르며
내게 가까이 온다
.................
버림받고 더러운 모든 것들이
신성하다
나는 연락하러 그곳에 간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