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월 황광우의 산책》 1975년 광주일고 학생들이
48년 만에 만났다. 1975년 5월 교문돌파 시위를 모의하였던 우리는 만나 그날의 일을 회고하였다. D-day는 5월 2일이었다. 주범 최수일은 하루 전날, 후문의 돌쩌귀를 망치와 끌로 부수고 있었다. 5월 1일 깜깜한 밤중이었다. 어디에선가 낯선 사람들이 다가와 연행해갔다. 돌고개에 있던 서광주경찰서로 끌려가 뒤지게 얻어맞았다. 화정동에 있던 중앙정보부 광주 분실로 끌려가 통닭구이에 물고문을 당했다. 도청 앞에 있던 전남 도경 대공분실로 끌려갔다. 손톱 사이를 찔렀고, 담뱃불로 입술을 지졌으며, 생식기에 종이를 꽂았다.
3인의 학생(최수일, 오순기, 황광우)에게 구속영장이 떨어진 날은 5월 8일이었다. 생활기록부를 떼어 보았다. 16인의 학생에게 퇴학 조치를 결정한 날은 5월 7일이었다. 5월 7일 16인의 학생을 퇴학시켰고, 5월 8일 3인의 고교생을 구속시켰으며, 이어 5월 13일, 긴급조치 9호를 발동했다. 전두환이 전남대생의 시위를 진압하기 위해 80년 5월 18일 신우식의 7공수를 광주에 투입하듯, 박정희는 당시의 긴박한 사태를 진압하기 위해 긴급조치 9호를 발동하였다. 5월 8일과 5월 13일 사이에 무슨 사태가 벌어졌는지 찾는 일은 역사가들에게 맡긴다. |